자유화는 문화적 취향 소비 통해
과시·타인과 구별 결과만 초래
자발·독립성 찾아내기 어렵다
정치적 억압 수동적 만들진 않지만
창의력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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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0년 G20 서울정상회의 폐막식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국기자들에게 질문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한국기자들은 오바마의 두 차례 요청에 거듭 침묵을 지켰고 정작 그 마이크는 중국기자에게 넘어갔다. 그 자리의 한국 기자들이 마땅한 질문거리를 준비하지 못했을까?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고 국가의 위신을 세워야 한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울렁증 때문이었을까? 청와대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은 사전에 협의된 질문을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발언하지만, 대통령의 두루뭉술한 답변에 대해 재차 캐묻거나 약속된 범위를 넘어서는 질문을 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언어문제는 아니다.

최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중고교생 두발자유화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머리 모양을 정하는 것은 학생들의 '자기결정권'에 해당하며 기본권으로서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차원에서 각 학교 단위에서 이를 공론화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학생들을 피동적, 수동적 존재로 보고 제한만 하는 낡은 교육관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가 기대하는 결과는 시대변화에 부응하는 능동적이고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학생이자 시민이었을 것이다. 두발자유화가 기본적 인권의 문제이고 이를 민주적 공론화 과정을 통해 성취해내면 기자들이 보여준 억압된 피동성을 벗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창의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중국사회에서 성장하고 활동해온 중국인 기자가 보여준 무례할 정도의 당당한 모습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그 핵심적 문제로 보기도 어렵게 한다. 이미 상당한 정도로 진전된 두발자유화가 교육감의 선언으로 촉발되어 설사 민주적 공론화 과정을 거치더라도 학교 내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고 나아가 학생들의 자기주도성과 민주성, 그리고 창의성을 높일 것 같지도 않다.

돌이켜보면, 자유화는 항상 기대했던 바의 바람직한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된 이후, 2011년에는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이른바 '등골브레이커'점퍼가 유행하였고, 작년에는 연예인이나 축구선수들의 전유물이었던 롱패딩이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새로운 '잇템'으로 떠올랐었다. 자유화 세례 이후 맘카페가 확산시킨 유기농 수제 '미미쿠키'를 먹고 자란 학생들은 '스타벅스'와 같은 카페브랜드를 소비하고, 이제는 프리미엄 취향의 '시그니처' 메뉴와 그 매장을 문화적으로 소비하게 된다. 이렇게 성장한 대학생들은 해외여행과 해외어학연수는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고, 독립적인 개성으로서의 워킹홀리데이와 해외생활을 시도해야 한다. 용돈을 마련하고자 많은 시간을 알바에 투입하면서도 해마다 바뀌는 휴대폰 신모델을 구입해야 한다. 자유화가 문화적 취향의 소비를 통해 자신을 과시하고 타인과 자신을 구별 짓는 결과만을 낳을 뿐 그 어디에도 자발성과 독립성, 그리고 창의성을 찾아내기 어렵다. 즉, 정치적 사회적 억압이 반드시 수동적 존재를 만들지도 않지만, 자유화가 창의성의 필요충분조건도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교수로 자리 잡은 중국인 교수 동거는 "표현에 서투르고 토론을 기피하는 한국인들은 과정과 결과를 다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살면서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나만의 것에 대한 확신을 포기한다"고 말한다(중앙일보 10월 5일자). 자유화가 정치적 억압을 벗어버리고 원하는 바 풍성한 열매를 맺기 전에 사회적 억압이라는 장애물을 만나서 개인적 창의성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선택인 사회적 유행의 따라잡기와 사회적 구별짓기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사회학자 막스베버는 젊은이들이 '개성'과 '체험'이라는 우상을 숭배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자기의 일에 대한 도취와 헌신, 그리고 영감을 통해 그 일의 정점에 오르기보다는 단지 남과 다른 체험을 자신의 독특한 개성으로 과시한다는 것이다. 에디슨의 '99%의 노력과 1%의 영감'과 달리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체험을 영감으로 동일시한다. 정작 우리 사회 안에는 베버나 에디슨이 그리는 방향으로 젊은이들을 이끌고 격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결여되어 있다. 젊은 청년창업가 표철민씨의 말의 울림이 오래 느껴진다(중앙일보 10월 5일자). "성장이 느리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평생 할 수 있습니다. 평생 할 각오로 꾸준히 임하는 데 성공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그가 지닌 용기와 확신이 살아온 동안의 불편을 연상시킨다. 자유화는 억압을 없애는 출발점일 뿐이고 그 열매는 사회적 자유화 속에서 영글어 갈 수 있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