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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인 이영도에 5천여통 보내며
지고지순한 정신적 사랑 나눠
아픈 아내에 대한 애정도 지극
그의 유약함에서 비롯된 친일문학
지조의 중요성을 교훈으로 남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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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 시인
시월의 통영은 아름답다. 하늘은 연옥빛이고 바다는 청옥빛이다. 시내로 들면 길들은 분주해지고 가로수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다. 유치환이 매일 편지를 부치러 찾았던 중앙우체국은 좁은 골목에 있다. 빨간 우체통과 시비 '행복'을 세워놓아 정겹고 친근하다. 청마 유치환(1908. 7. 14~1967. 2. 13)은 생명파 시인으로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강인한 남성적 어조의 시풍을 지닌 시인으로 '깃발', '생명의 서', '행복'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가 1945년 가을부터 1년간 국어교사로 근무했던 통영여자고등학교를 찾았다. 가을 햇살이 하얗게 내려앉은 교정은 휴일이라서 고즈넉했다. 본관 교사는 해방 전부터 있던 건물이어서 긴 복도 끝에서 유치환의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리는듯했다. 이 복도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가사교사인 이영도를 마주쳤을 것이다. 그때마다 이영도는 볼 붉어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유치환은 38세의 유부남이었고, 이영도는 어린 딸과 살고 있는 29세의 미망인이었다. 유치환은 이영도에게 편지로 마음을 전했고, 이는 결코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고 설득했다. 좀체 마음을 열지 않던 이영도가 3년쯤 유치환의 지극한 편지를 받고 나서 정신적인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52년에 쓴 편지에서 유치환은 '오늘은 죽을 성 우울했습니다. 바람이 심하고 안개가 자욱한 탓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돌아와 책상에 마주 앉아 뉘우침처럼 느껴지는 것은 진실한 사랑 앞에 얼마나 많은 사회적 제약이 막아서는가 하는 것입니다… 8월 14일 당신의 마'라는 편지에서 두 사람이 얼마나 힘든 사랑을 하고 있었는지 읽힌다. 유치환 사후에 이영도는 5천여 통의 편지 중에서 골라 서간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수익금 전부를 사회단체에 기부했다.

유치환이 급서한 날은 1967년 2월 14일이다.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야간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다 급행버스에 치여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날 아침 원고지에 남긴 유고시가 그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어 안타깝다. '등성이에 올라 보노라면/내 사는 거리는 아슴한 저편 내 끝에서부터/내 발밑까지 첩첩이 밀려 닥쳐 있고/이쪽으로 한 골짜기 화장장이 있는 그 굴뚝에서/오늘도 차사의 연기 고요히 흐르고 있거니…… 마침내 돌아와 전 같이 잔잔히 잔잔히/한줌 불귀의 흔적 없는 자취로/거두어짐은/아아 얼마나 복된 맑힘이랴'라고 죽음을 예찬한 것이다. 이영도는 유치환과 교류하면서 여러 편의 연시조를 남겼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오면 서글프고/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서로 야윈 가슴 먼 창(窓)만 바라다가/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에서는 애련의 절절함과 처연함이 읽힌다.

절절함과 처연함으로 말하면 유치환의 '행복'을 들어야 할 것이다. '…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에 이르면 유치환의 지순하고 숭고한 사랑을 느끼게 한다.

유치환은 아내에 대한 사랑도 지극했다. '병처'는 그의 지극함이 드러난 시편이다. '아픈가 물으면 가늘게 미소하고/아프면 가만히 눈감는 아내…… 한 떨기 들꽃이 피었다 시들고 지고/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또한 죽어가다/이 앞에서는 전 우주를 다하여도 더욱 무력한가/내 드디어 그대 앓음을 나누지 못하나니'는 앓고 있는 아내를 간병하며 읊은 노래다. 유치환은 친일의 산문과 시편을 남겨 아쉬움을 갖게 한다. 시인이며 교수인 박태일에 의해 밝혀진 그의 친일 문학 작품은 문인의 유약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문인에게 투철한 역사관과 확고한 민족애, 그리고 지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교훈으로 남긴 청마다.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