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충·한남충·진지충·급식충 등
혐오감 근거한 신조어 유통 촘촘
돌발 사건 발생땐 '뇌 짜증' 감정
공감여지 사라진 이해불가 유령
스트레스 유발 스스로 발목 잡아

월요논단 홍기돈2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자고 일어났더니 벌레로 변해 있더라는 설정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변신'의 도입부 내용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저마다 '변신'의 주인공인 그레고르 잠자가 되어버린 것일까. 도처에 벌레가 득실대고 있으니 해보는 생각이다. 아이를 동반한 엄마는 맘충(Mom­蟲)이며, 한국 남성은 한남충(韓男蟲)이고, 뭔가 곰곰이 따져보려면 진지충(眞摯蟲)이 되고 만다. 학교 급식을 먹는다는 이유로 10대 청소년에게는 급식충(給食蟲)이라는 딱지가 붙고, 늙기도 서럽거늘 노인이 되면 틀딱충(틀니 딱딱거리는 蟲)으로 내몰리고 만다. 벌써 맘충, 한남충, 진지충, 급식충, 틀딱충을 줄줄 늘어왔으니 이 순간 나는 영락없이 설명충(說明蟲)으로의 본색을 드러내고 만 셈이다.

어디 벌레만 문제겠는가. 벌레 신분을 겨우 면했어도 찐득찐득 들러붙는 모멸을 피해내기가 또 만만치 않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여성은 된장녀라는 틀에 갇히며, 데이트에서 더치페이를 요구하는 남자는 꽁치남으로 전락한다. 운전이 미숙한 여성은 그나마 실수한 근거가 드러났으니 김 여사라는 비아냥에 감지덕지해야 하는 걸까. 하다 하다 요새는 서로에 대하여 폭력 행사가 필요하다는 신조어까지 확산되고 있다. 여자는 삼일에 한 번은 패야 한다고 하여 삼일한이란 말이 만들어졌고, 이에 대응하여 한국 남자는 숨 쉴 때마다 맞아야 한다고 해서 숨쉴한이란 용어가 출현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도대체 누군들 이 촘촘하게 직조된 모멸적인 언사(言事)의 그물로부터 도망칠 수 있겠는가.

혐오감에 근거하여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이를 널리 유통시키고 있는 이들은 참신하고 발랄한 자신들의 감각에 내심 뿌듯해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네들은 결국 그 참신하고 발랄한 감각에 자신의 발목을 잡히고 말 터이다. 신조어를 즐기는 그네들은 벌레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최근 뇌과학이 거두고 있는 성과에 주목한다면 인간이 짐승과 다른 소이가 어느 정도 알기 쉽게 해명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까지 인간의 뇌 구조는 '삼위일체 뇌'에 입각하여 이해되어 왔다. 파충류 뇌, 변연계, 신피질로 나뉘어 있어서 이는 각각 욕구(예: 배고픔과 성욕), 감정, 이성(합리적 사고)을 담당한다는 것이었다. 짐승의 경우엔 뇌에 신피질 부위가 없는 까닭에 합리적 사고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는 감정과 이성을 대립시킨 뒤, 이성의 우위를 주장하였던 서구 철학의 오랜 전통에 입각한 관찰 결과에 불과하다. 자, 뇌의 어느 영역에도 이미 입력된 감정 지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리사 펠드먼 배럿, 생각연구소, 2017)

신생아는 경험맹 상태인 까닭에 감정에 관한 개념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외부 자극에 대하여 나름의 반응을 보이면서 점차 경험을 쌓아 나간다. 예컨대 화가 나면 소리칠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으며, 노려볼 수도 있고, 찡그릴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선택지 가운데 그는 자신의 의도를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한다. 즉 문화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을 습득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체험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보편 범주로 이월하게 된다. "분노 같은 감정 단어는 다양한 사례들로 이루어진 개체군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이런 단어들은 모두 주위 환경 속에서 행동을 가장 잘 인도하기 위해 구성된 것들이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짐승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인간은, 구체적인 감정 사례가 아닌,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감정 범주에 근거하여 타인의 상태와 의도를 읽어낸다. 또한 타인과 뒤섞였던 과거 경험의 안내를 받아 미래를 예측하기도 한다. 뇌과학에서는 예측을 신체 예산의 결부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가령 "다른 운전자가 갑자기 끼어드는 바람에 혈압이 오르고, 손에 땀이 날 때, 그래서 당신이 급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큰소리를 치고 짜증을 느낄 때" 신체 예산이 조절된다. 즉 뇌는 사태 발생 이전 시뮬레이션에 따른 에너지의 사용처와 사용량을 계산해 두었는데, 돌발적인 사건의 발생으로 인해 예산이 조절되었다는 것이다. 짜증이라는 감정은 이러한 순간 발생한다.

요즘 확산되고 있는 신조어들은 혐오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까닭에 배타적인 감정 범주를 구성하게 된다. 이때 감정 범주에서 이미 배제된 이들의 감정은 추체험할 수 없게 된다.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깥으로 밀어내 버린 영역에서 도저히 이해가 곤란한 유령이 출몰하기 시작한다. 유령과 맞닥뜨린 이들은 신체 예산의 급작스러운 조절에서 허우적대느라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타인을 벌레로 만들기에 골몰하는 이들이 제 스스로 발목을 잡아채게 되는 과정이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