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오이디푸스…' 관객 능동적 위치 전환
배우가 의문 던지면 함께 공론장 참여 형식
사회성숙도 힘 아닌 대화로 갈등 조정 직조
지연·중지담론 경계 질문 그치면 진실 닫혀


전문가 권순대2
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지난 10월 11일부터 14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극단 놀땅의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2016년 초연) 공연이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 이후 여러 이미지로 변주되어 온 인물이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역병에서 도시를 구하는 인물, 눈이 멀어 볼 수 없으나 통찰력을 지닌 인물, 왕을 죽이고 왕이 된 인물, 그리고 은폐된 진실을 조사하는 인물 등 시대와 작가에 따라 다양하다. 극단 놀땅의 오이디푸스는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질문하는 자로 조사하는 인물에 가깝다. 올해로 세 번째인 이번 공연은 우리 사회가 왜 오이디푸스를 다시 호명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연극이 시작하면 무대는 광장으로 바뀌고, 관객은 시민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아니다. 도시의 광장에 시민이 모이자 비로소 연극이 시작한다. 광장으로 바뀐 무대에서 관객은 처음에는 관찰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지만 연극이 진행되면서 참여자의 위치로 점차 옮겨가게 되며 종국에는 배심원의 자리에 앉게 된다. 무대의 배경은 세월호 이후 역병이 창궐한 도시이다. 눈이 먼 거지로 등장하는 오이디푸스가 의문을 던지면 관객은 배우와 함께 공론장을 만들게 된다. 우리 사회가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전환하였는지 아니면 생명과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지에 대해 관객이 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연극은 끝난다.

샤츠슈나이더는 정치가 갖는 역동성의 기원이 갈등에 있다고 주장하며 갈등을 민주주의의 엔진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정치의 과정과 결과는 갈등을 구성하는 네 가지 차원(범위, 가시성, 강도, 방향)에 달려 있다. 그 중에서 갈등의 범위는 누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갈등에 관여하는가의 문제이다. 관찰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행위자로 참여하게 되면 힘의 균형에 변화가 생긴다. 기존 질서의 힘에 균열을 가해야 하는 약자는 다수가 개입하도록 해서 갈등의 범위를 확장하여야 한다. 연극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가 관객을 수동적 위치에서 능동적 위치로 전환하는 형식을 가져온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질문이 사라진 사회는 얼마나 위태로운가. 질문하지 않는 사회는 겉으로 평온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질문이 없어 역동성이 사라진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사라진 질문으로 인해 갈등마저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있다. 극 중에서 오이디푸스가 아무리 "질문이 곧 답인데…"라고 외쳐도 시민이 나서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무대가 광장이나 교실로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한 사회의 성숙한 정도는 그 사회가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물리적 힘에 의한 해결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갈등의 조정 과정에서 그 사회의 빛과 그늘이 직조하는 무늬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갈등의 사회화 과정에서 경계해야 하는 대표적인 두 목소리는 지연과 중지의 담론이다. 지연의 담론은 "당신에게 권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몫의 배분을 결정하는 현재의 조건을 아직은 바꿀 때가 아니라고 말하며 미래로 지연시킨다. 중지의 담론은 "당신은 할 만큼 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만하라"라고 말한다. 이미 충분히 노력했으니 이제 어쩔 수 없고 우리는 지쳤다고 말하며 현재에서 중지시킨다. 두 담론 모두 지금의 경계선을 유지하려는 목소리이다. 갈등의 범위를 확장하고 그 방향을 전환하려는 주장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는 주로 후자의 담론을 극장으로 가져와 관객과 함께 토론하는 연극이다.

질문이 그치면 진실의 문은 닫히고 만다. 진실의 문을 여는 질문의 힘은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의 초연이 있던 2016년 겨울에만 유효하지 않다. 광장에서 촛불과 외침이 잦아들었다고 해서 물어야 마땅한 질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 우리 사회가 세월호 이후 생명안전사회의 건설로 전환하지 못했다면 더욱 그러하다.

/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