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그레한 좀살이 돋아나면
도(道)를 지나친 악행의 흔적
이는 하늘이 노해 징벌 내린것으로
절대 속일 수 없다는 증거
![전문가-김나인2](https://wimg.kyeongin.com/news/legacy/file/201810/2018102201001573300075091.jpg)
세상(世上)의 일은 원인(原因)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結果)를 낳게 되는 것이고, 결과는 원인 없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평소 행하는 행위의 결과는 복록으로 이어지고, 때로는 응징의 징벌로 내려지는 것이니, 눈 밑 누당 부위가 검은 먹구름 같은 어두컴컴한 기색이나 또는 굴뚝에서 나오는 탁한 연기와 같은 희끄무레한 기색으로 가득 차오르거나, 불그레한 좀살이 돋아나고 어지럽게 가로세로 줄 문양이 생겨나면, 도(道)를 지나친 악행의 흔적이다. 이는 하늘이 노하여 인간을 대신하여 징벌을 내리는 것이니, 인간과 세상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늘은 절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눈 밑의 형체와 기색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행한 모든 과업의 흔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숨어서 몰래 행하는 악업(惡業)은 들어오고 나가는 문을 순간은 알 수 없으나 악업이 쌓이고 쌓여 그 도(道)를 넘어서면, 화흉(禍凶)이 되는 것이니, 어찌 선을 행하고도 고통의 과보라 말할 것이며, 남 몰래 행하는 악행 역시 그 문이 열리는 것을 쉽게 알 수 없으나, 선업(善業)이 쌓여 하늘에 닿으면 길복(吉福)이 되는 것이니, 어찌 하늘이 이를 외면하겠는가. 그 사람이 행하는 모든 행위의 결과는 반드시 과보로 남겨지게 되는 것이고, 눈가 밑에 고스란히 흔적으로 남아 음덕문이 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을 통하여 '하늘은 성글어도 인간 행위 하나하나 절대로 놓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음덕문은 마음의 바탕에 기준하여 열리고 닫히는 것이며, 그 행위가 선행인지 악행인지에 따라 흔적을 남기는 일이니,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행동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행이라 보기는 어렵다 할 것이다.
세상에 나올 때 누구라도 자신이 직접 부모를 결정하고 얼굴형체를 만들고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부모라는 인연이 만들어준 하나의 생명체로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부유한 부모를 두는 것도, 가난한 부모를 두는 것도 모두가 전생(前生)의 업보(業報)에서 출발하여 현생(現生)의 과보로 이어지는 일이니, 인간의 능력과 의지에 물을 일이 아닌 것이다. 이마가 풍륭하고 넓은 것도, 이마가 좁고 낮은 것도 눈썹이 수려하고 단정한 것도, 건강한 몸도 병약한 몸도 자신이 직접 만들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기에 선과 악의 업보로 윤회를 통하여 또 다른 현생으로 이어지는 과보의 결과물을 갖고 태어나는 일이니 얼굴의 형체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
전생의 과보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렇다면 한 번 부여받은 명운(命運)은 절대 변화시킬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의 얼굴의 체형과 짜임새는 선천적(先天的)인 명운이기에 쉽게 바꿀 수는 없는 일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마음가짐에 따라 눈동자의 빛과 얼굴의 기색은 얼마든지 변화되고 바뀌게 되는 것이다. 어렵고 고단한 살림살이라도 성정이 맑으며, 얼굴 기색이 밝고 깨끗하면 하늘이 음덕을 베풀어 장차 부귀를 취할 사람이니, 좋은 환경을 만나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관상을 살필 때는 그 사람의 외형만 취하지 말고, 마음의 바탕인 심상(心相)을 잘 헤아리고 살피라 하는 것이다. 남을 자신의 몸과 마음처럼 아끼고 돌보며 선업을 즐겨 하는 사람에게는 음덕문이 열려 현생의 길을 밝게 비춰주는 것이니, 어찌 이마가 좁고 코가 부실하고 턱이 빈약하다 하여 부귀공명과 무관한 사람이라 하겠는가.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며 돕고 손잡아 주는 일은 얼굴의 생김새에 묻는 일이 아니라 심성에 물을 일이다. 이런 사람의 관상을 보면 비록 삶이 곤고하고 넉넉지 않아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 누당의 기색이 밝아오며 눈빛의 광채가 은은히 뻗어나면 그 사람의 내적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이런 사람의 심상을 100억에 비하겠는가.
/김나인 한국역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