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는것에 만족하고 찬사 보내
그 덕에 인터넷이 언론과 표현 점령
오늘날 민주주의 과거보다 더 위험
진실 가리는 정보들 교묘하게 작동

국가를 믿고, 국가가 시민들의 의지에 의해 수립되어야 한다고 믿고, 그러지 않은 정부라면 뒤집어 버리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때, 국가가 없는 세계야말로 유토피아겠지만 그 국가 없는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국가 아닌 국가', '국가를 폐절시키는 국가'의 단계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때도 순진하다면 순진했다. 그런 국가가 얼마나 타락했던가를 깨닫고 국가 없는 세계에 대한 꿈도 함께 잊었을 때 국가라는 문제는 곧 어떤 정부냐 하는 문제로 바뀌어버렸다. 국가를 심문하지 못하게 되자 '근본주의'적 사유는 빛을 잃고 앞에 놓인 정부들 중 하나를 양자택일 식으로 골라잡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순진함이여, 썩 물러가라. '내'가 선택하고 지지한 어떤 정부도 선하지만은 않았으니, 다시는 '내' 의지를 어떤 정부를 위해 사용치 말라. 아깝지 않느냐, 낭비해 버린 젊음의 시간들이. 위선에서 교활을 거쳐 야만으로. 그리고 이제 다시 쇼로. 쇼가 펼쳐지는 무대 뒷면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홉스는 만약 정부가 없다면 사람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날을 지새우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자연 상태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정부에 위임코자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정부를 갖고 있는가? 악 대신에 선이 활동하는 국가 말이다. 살의에 관해서 생각한다. 만약 정부가 선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사람들의 살의는 정부의 선한 중재에 의해 사그라들 수 있겠다. 과연 정부는 그런 선의로 시민들 위에 군림하는가?
과거에 어떤 정부는 자신이 저지른 악 때문에 전전긍긍했다. 그런 때만 해도 좋은 통치를 위한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선의를 위한 타협과 거짓, 선을 행하기 위해 메피스토펠레스와 단 한 번 계약을 맺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의 본분은 유혹에 빠뜨려진 자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 유혹에 응한 욕망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그 어떤 정부는 악마의 손아귀에 들어 갈기갈기 찢기우고 말았다. 악수인 줄만 알았던 것이 수렁에 빠진 격이 되어 끝 모를 이중성을 이어가다 마침내 파멸해 버린 것이다. 만약 순진했던 정부가 악에 익숙해지면 어떻게 될까. 정부를 이끄는 사람들이 이중성에 익숙해지면, 무대에서는 선을 보이고 장막 뒤에서 악을 행하는 데서 편리를 취하는 기술을 익힌다면. 그 어떤 파산한 정부의 뒤를 이은 정부들은 사실상 그러했다. 그들은 교활하기도 했고 야만적이기도 했지만 나아가 보여주고 보임 뒤에서 다른 수를 내는데 익숙했다.
오늘날에도 시민들은 순진하고 환상에 머무는데 익숙하다. 그들은 보여주는 것에 만족해서 찬사를 보내며 머물기 좋아한다. 옛날에 어떤 지도자는 그래서 국민들보다 반 보만 앞서 가라 했지만, 차라리 반 보를 늦게 가야 더 큰 찬사를 받을 수 있는지 모른다. 보여지는 것에 약한 시민들 덕분에 인터넷 가상 현실이 언론과 표현을 점령하다시피 한 오늘날 민주주의는 과거보다 더 큰 위험과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 빠르고 광범위한 전파 능력은 보여주는 세력에게만 이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환각 이면의 진실을 탐색하는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제공하기는 한다. 그러나 사태는 절대 간단치 않다. 진실을 가리는 정보들의 숱한 집적과 '좋은' 정보를 향한 접근 자체를 가로막는 온갖 교묘한 기술과 트릭이 작동한다. 지난 여름부터 가을까지 정치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실감하게 되면서, 아하, 이제 천치가 되자 생각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진정한 친구가 어디 있는지 생각하지 않으면 편할 것 같다. 이미 모든 게 뒤얽히고 엎어져 버렸다. 이 비관은 어디에서 오는가.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도 없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