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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막한 능선 이어진 화산 자락
두 능을 가운데 둔 솔숲 흙길 산책
역사적 의미 부여하지 않더라도
생사 잇는 무덤이 주는 휴식같은
아득함은 생각 정리하기에 '그만'


에세이 김인자2
김인자 시인·여행가
만추다. 햇살은 여전히 사랑스럽다. 가을은 어느 사막으로부터 왔을까. 계획에 없던 길 위에 서게 하는 이 계절은 대체 어느 국경을 넘어 예까지 온 걸까. 과잉과 결핍 사이 풍성하고 메마른 천 개의 손을 내미는 기다림의 계절, 슬픔을 지나고 나야 비로소 보이는 기쁨들, 단풍을 지나 낙엽과 나와 일대 일이 되어보는 것, 숲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 가을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나는 고작 하루 시간을 할애해 길을 나설 참인데 가까운 수목원 아니면 서쪽으로 일몰을 보러 갈까 하다가 생각난 곳이 용주사와 융건릉. 그래, 이곳이라면. 명품 소나무 숲 융건릉 둘레길을 걸어보고 싶은 유혹이 바람처럼 일었다. 봄에 활엽수들이 몽글몽글 솟아오를 때도 좋지만 오래된 소나무 숲이 주는 안정감은 계절을 초월 그 어떤 숲과도 비교불가인 그만의 특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걷다 보면 얼마 전까지 나를 따르던 잡다한 생각들은 슬며시 뒤로 물러나고 만다. 보고 싶은 걸 볼 수 있고 듣고 싶은 걸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내게 가을은 텅 빈 허수의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원하는 대상을 만나지 못한 건 너무 빠르거나 아직 때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므로 조급해할 일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진여(眞如)라 한다. 그리고 무위(無爲)란 작위(作爲)를 배제하는 것이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노자의 독법의 기본은 무위다. 그러므로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하나의 실천방법이다. 용주사에 들러 나를 따라온 햇살을 등에 업고 법당에 잠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고목 끝에 매달린 마지막 단풍과 낯선 곳에 영혼을 두고 오는 일 없기를 바라는 맘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용주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고찰로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만들면서 이곳을 원찰로 삼아 다시 증축하였다. 정조는 총애하던 단원 김홍도를 보내 용주사를 중창하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고 용주사에 남아 있는 김홍도의 손길 중 하나가 '부모은중경'이라는 불교경전을 그림으로 그린 '부모은중경판'이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김홍도는 정조의 명으로 일주일간 기도를 해야 했다고 하니 정조의 효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와 사도세자의 불운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어도 내겐 용주사가 주는 소중한 기억 한 자락이 있다. 교과서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지훈의 '승무'라는 시의 배경이 바로 이 용주사라는 사실을 나의 스승께서 생전에 말씀해 주셨는데 조지훈 시인이 내 시의 스승이던 분의 스승이었다는 점도 내게 의미를 더하곤 했다.

요사체가 많아 다소 번다한 용주사를 나와 융건릉을 돌아보는 동안 기다렸다는 듯 숲은 포근히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자연을 통해 설명 불가한 해방감을 느끼곤 하는데 그것이 내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 남쪽엔 백일홍도 코스모스도 지고 없다는데 기쁨이 슬픔이 되고 슬픔이 기쁨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 만추의 아름다운 쓸쓸함은 내가 사라진 후에도 무한 반복으로 이어지겠지.

빛이 물러나고 검은 밤이 어떻게 날개를 접고 내려앉는지 몽롱한 의식으로 오래 바라본 날이다. 자연은 소리도 없이 많은 말을 하고 사람은 그것을 경험으로 통역한다고 했던가. 발전은 새로운 도전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결국 자신의 마음을 바꾸려는 의지가 없다면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 아닌가. 도심에선 많은 사람 속에서 외로웠는데 이곳 시골살이는 사람이 없어도 외롭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융건릉은 사도세자와 헌경왕후 혜경궁 홍씨가 합장된 융릉과 정조와 효의황후 김씨가 합장된 건릉이 모여져 붙인 이름이다. 나지막한 능선으로 이어진 화산 자락에 이 두 능을 가운데 둔 융건릉 둘레길은 솔숲 사이로 난 흙길을 산책하듯 걷기에 좋다.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생과 사를 잇는 무덤이 주는 휴식 같은 아득함은 생각을 정리하기에 그만이다. 바람이 쌀쌀해졌다. 우린 곧 겨울이야기를 하겠지.

/김인자 시인·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