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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1957년 당대 최고 감독 신상옥은 신필름을 설립하고 배우 모집에 들어갔다. 264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강영일. 하지만 신 감독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그에게 신필름의 '신', 한국 영화계의 새별이 되라는 의미의 '성', 일등 배우가 되라는 뜻의 '일',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대한민국 아니, 건국 이래 최고의 배우 신성일은 그렇게 탄생했다.

50년대 말 한국 영화계는 신상옥 최은희의 신필름과 홍성기 김지미의 홍성기 프로덕션으로 양분돼 있었다. 소속 배우도 신 감독 측엔 김승호 김진규 등이, 홍 감독 측엔 최무룡 장동휘 남궁원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유명 배우만을 선호했다. 무명 배우가 출연하면 흥행이 신통치 않았다. 흥행 실패는 파산을 의미했다. 그래서인지 두 영화사 모두 신인을 키우지 않았다. 신필름이 신성일을 뽑아놓고 미적거린 것도 흥행 실패의 두려움이 작용했다. 신성일이 스타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이런 분위기 탓이 컸다.

신성일은 1960년 신필름의 창립 작품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지만, 그저 잘생긴 배우 정도의 이미지만을 남겼을 뿐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마침내 1964년,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제임스 딘이 그랬던 것처럼, 카리스마 있는 반항아 이미지와 청바지가 잘 어울렸던 신성일은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고 '청춘물'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의지로 돌파해가는 남성적인 분위기'가 한국 영화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로 시작되는 최희준의 노래도 빅히트를 쳤다. 신성일은 거칠 게 없었다. 1964년부터 8년간 개봉한 1천194편의 작품 중 324편에 그가 출연했다. 특히 1967년 제작된 한국영화 총 187편 중 신성일 출연 작품이 무려 51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치권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두 번의 낙선 끝에 '강신성일'로 이름을 바꾼 후 16대 총선에서 당선됐지만 삶은 그리 평탄치 못했다. 옥고도 치렀다. 나운규 이후 최고의 배우이자 '한국의 알랭 들롱', 60년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꽃 피웠던 배우 신성일이 4일 새벽 향년 81세로 숨을 거뒀다. 그의 이름 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이 지금 슬퍼하고 있다. 우리 영화사 가장 중심에 서 있었던 최고의 배우가 그 자신이 하나의 역사가 돼 우리 곁을 떠났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