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정부가 노동계의 반발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오늘 청와대에서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출범시키지만, 민주노총은 어제 총파업으로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민노총은 이제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민노총은 고집불통.(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라고 몰아세운다. 하지만 서운하다는 표시이지, 척을 지겠다는 의지는 아니다. 민노총이 오히려 당당하다. '우리 때문에 집권한 것 아니냐'는 채권자의 위세가 대단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생전에 정치지도자의 덕목으로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강조했다. 현실을 외면한 정치철학의 공허함과, 철학이 없는 현실감각의 천박함을 동시에 경계한 것이다. 그는 공기업 민영화와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IMF위기를 단숨에 돌파했다. 노동자의 실직과 저임금을 감수한 용단이었다. 이지스함 건조를 시작했고 크루즈 미사일 개발에 착수하는 한편 대북 미사일 사거리를 연장했다. 재건된 경제와 강화된 안보를 바탕으로 햇볕정책을 밀어붙이고 임기말에 평양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도 그의 현실감각을 보여주는 사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토론에 의지한 민주주의 통치론과 순결한 도덕성을 리더십의 근간으로 삼았다. 일선 검사들과의 맞짱 토론을 감수할 정도로 여론과 직접 맞섰다. 자신이 틀렸다면 입장을 바꾸는 도덕성의 소유자였다. 대통령 선거 공약과 달리 철도 민영화에 나서고, 기간제법과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을 처리했다. 민노총과의 약속과 국가경제를 위한 노동정책을 견준 뒤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DJ정부의 햇볕정책만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문서로 구체화했다. DJ의 리더십은 노무현 시대에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의 서생적 문제의식은 선명하다.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구분하는 문제의식은 비판의 수용을 거부한다. 소득주도성장 집착증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문제의식 밖의 현실은 차갑고 거칠다. 이·영·자(20대·영남·자영업자)가 등 돌리고, 한미동맹은 흔들리며, 한일관계는 최악이다. 정부와 여당이 이쯤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작동한 상인적 현실감각을 복기해 보길 권한다. 민노총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은 문재인 정부의 상인적 현실감각을 판단할 수 있는 가늠자다.
/윤인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