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 제작이 발표되자 영화계가 크게 술렁거렸다. 주연을 한국 최고의 배우 장동건이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저예산 영화에 장동건이 출연한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김기덕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내가 자청했다.개런티는 중요하지 않다"는 장동건의 말이 더 화제였다. '해안선'은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흥행은 참패했다. 한국 5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한국인의 알 수 없는 영화 취향'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오히려 외국에서 이 영화를 주목했다.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JSA'보다 더 관심을 끌었다. 간첩을 잡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해안 초병이 실수로 민간인을 사살한 뒤 파멸해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광기와 영혼의 파괴, 나아가 남북 분단 아픔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는 호평이 이어졌다. 장동건의 광기 연기는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에서 말론브란도가 보여준 광기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장동건이 이렇게 연기를 잘했었나"라 할 정도로 '메소드 연기'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김기덕이 '해안선'에서 주목한 건 '철책선'이다. 철책선은 전쟁 이후부터 지금까지 남북 분단의 상징이었다. 그동안 많이 철거됐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해안가 곳곳에는 '이곳은 군사작전 구역이니 출입을 엄금함'이라고 쓰인 철책선과 경고판이 늘어서 있다. 해안은 아름다운 피서지가 아니라 출입금지 팻말과 철책선 둘러쳐진 분단의 현장이다. 영화는 철책선을 통해 분단의 아픔을 극명하게 그려냈다.
국방부가 2021년까지 경기도 해안과 강에 설치된 철책선 107㎞, 인천 도심 해안가를 둘러싸고 있는 철책선 44㎞를 철거한다고 발표했다. '긴 해안선과 연안자원'을 한국 발전의 원동력으로 꼽고 어장 및 수자원 관리에 주력할 것을 주문한 건 200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엘리너 오스트롬 미국 인디애나대 교수였다. 철책선 철거로 해안선이 우리 품으로 돌아온다면 지역경제 발전에 더할 나위 없는 큰 원동력이 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수년 전부터 '바다를 시민의 품에!'라는 기치를 내걸고 경인일보가 인천 녹색연합과 인천의 내륙 해안선을 탐사하는 '해안선 종주 프로젝트'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될 것이다. 다만 서해안에는 인천공항 평택 미군기지 등 안보시설이 많다. 휴전선 내 GP 철거에 이어 해안선 철책 제거로 혹시 '안보는 괜찮은가' 하는 걱정의 시선을 무시해선 안 된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