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총, 비리근절방안 거부 '생떼'
이에 호응하는 정치 세력도 있어
중국, 박사학위 관련 교육부 항의
대학 사회 요동치는데 묵인·방조중
'대입 평가방식만 교체' 변화요원


월요논단 홍기돈2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얼마 전 치른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어려웠다고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교육 전문가들의 진단과 대안이 제시되고 있는데, 다소 생뚱맞을 수 있겠으나,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시간대 여러 사건들을 겹쳐서 보게 된다. 그래야만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교육 문제의 실체가 비로소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유치원총연합회(이하 한유총)의 사례를 보자. 감사 결과 사립유치원 운영자가 유치원비로 명품백, 성인용품 따위를 샀다는 등의 문제가 알려졌다. 자, 이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한유총은 비리 근절 및 투명성 확보 방안 도입을 거부하고 있다. 유치원은 사유재산이라는 게 근거다. 기실 이는 전혀 말이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가 자유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옹호하는 것은 맞지만, 타인 또는 사회 영역에 해악을 끼치는 경우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질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런 식의 생떼 쓰기는 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가관인 것은 이에 호응하는 만만찮은 정치 세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유아교육법 개정안 통과에 딴죽 거는 자유한국당을 겨냥하여 홍문종, 나경원, 장제원 의원의 실명을 거론한 바 있다. 사학재단 집안 출신인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한유총의 주장하는 바가 일치하기에 옹호하는 게 아니냐는 힐난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두 가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첫째,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이들이 어째서 자유민주주의의 논리 근거에조차 무지할 수 있을까. 둘째, 어떤 명문대를 졸업했든 간에, 공익과 맞서는 사적인 이익을 국가 운영의 원리로 내세우는 이들을 과연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터넷 실시간 검색에 '조선일보 손녀'로 올라있는 사건 또한 퍽 상징적이다. 국·영·수 교과목 과외뿐만 아니라, 글짓기와 성악, 싱크로나이즈, 발레 등 상류층 엘리트 코스 교육을 받고 있는 열 살 먹은 아이가 50대 후반의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쏟아냈다. "네 부모님이, 네 모든 식구들이 널 잘못 가르쳤네." "아저씨 해고야. 정말 미쳤나 봐." 흔히들 이를 어린아이의 갑질이란 관점에서 접근하는데, 내가 정작 주목하는 것은 '상류층 엘리트 코스 교육'이라는 표현이다. 대체 사람들은 교육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가르치지 못하면서도 엘리트 교육이란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대학 현실도 암담하기는 마찬가지다. 중국 대사관으로부터 교육부가 받았던 항의를 보라. 충북대, 계명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등에서는 외국인 대상으로 한 학기 15주에서 16주 동안 진행해야 할 교과목들을 단 12일 만에 끝내고 박사학위를 내어줬는데, 이렇게 한국에서 받아온 박사학위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 중국 측의 항의 내용이었다. 교육이란 이름으로 학위 장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은 이들 세 대학의 문제는 극단적인 사례인 까닭에 불거졌을 뿐, 대부분의 대학들이 이와 같은 흐름에 편승하는 양상이라는 데 있다. 한국어 소통이 용이치 않은 외국인 학생들이 왜 대학 강의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가.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대학에서는 왜 그와 같은 학생들 유치에 목을 매고 있는가. 돈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 어디 학생들의 미래에 대한 고려가 있으며,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인 교육이 들어서 있는가. 대학의 숨통을 쥐고 있는 교육부는 이를 묵인·방조하고 있다. 시간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대학 사회는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는데, 교육부는 이에 대해서도 수수방관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폭탄 돌리기 하듯 다시 한 번 시행 유예를 선언할 수도 있겠다.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와 관련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껏 늘어놓은 물음들에 대해 답변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교육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은 채 대학 입시의 방편으로 그저 학생들의 평가 방식만을 교체해 나간다면, 불수능의 반복은 피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의 변화는 요원할 터이기 때문이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