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삼성 위장계열사 고발 40년 지체
주식보유 현황 허위신고 경고·벌점 그쳐
전속고발권 제도 악용 사례라는 지적도
검찰과 경쟁체제 구축… 분발하길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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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규 사회부장
"왜 매번 나쁜 놈들보다 늦습니까. 왜 한 발 먼저 움직이지 못합니까?"

2005년 1월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공공의 적 2'. 서울중앙지검 검사 강철중(설경구 분)이 명선재단 이사장 한상우(정준호 분)가 다음날 새벽 외국으로 도피하려 한다며 긴급 체포영장 발부 승인을 요청하자 지검장(박웅 분)이 한 말이다. 강철중 검사를 질책하는 것이 아닌 현실을 향해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로 해석됐다. 사학재단 봐주기, 대기업 봐주기 등 정부의 한발 늦은 사례는 그야말로 '차고 넘친다'.

'경제 검찰'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그룹이 업계 실적 1위인 삼우건축사사무소(이하 삼우)를 40년 가까이 위장계열사로 소유했다고 판단, 이건희 회장을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 이 회장은 삼성그룹의 동일인(총수)으로서 지난 2014년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지정을 위한 계열사 명단을 공정위에 제출하며 당시 차명으로 보유한 삼우와 서영엔지니어링(이하 서영)을 고의로 빠뜨린 혐의를 받고 있다. 삼우 임원 소유로 돼 있던 삼우는 실제로는 지난 1979년 3월 법인 설립부터 2014년 8월까지 삼성종합건설(현 삼성물산)이 소유한 것으로 드러났다. 1994년 설립된 서영은 삼우의 100% 자회사로 삼성종합건설의 손자회사인 셈이다. 타워팰리스, 서초동 삼성사옥,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등 삼성그룹 관련 설계를 전담한 삼우의 2005∼2013년 삼성 거래 비중은 27.2∼61.1%로 평균 45.9%다. 차고 넘칠만한 자료들이 있는데도 공정위가 움직인 건 무려 '40년'만이다.

공정위는 "지난해 하반기 익명의 제보자가 1999년 공정위 조사 때 삼성과 삼우 측에서 은폐한 증거 자료를 제출한 점이 '스모킹 건'이 돼 조사 범위를 넓혔다"며 "이를 토대로 차명 주주 5명을 소환하는 등 진술과 물증을 확보했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글쎄요'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가 지난 21일 차명주식이나 계열사 주식보유 현황을 허위 신고한 혐의로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과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을 재판에 넘겼다. 또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과 정창선 중흥건설 회장, 롯데 그룹 계열사 9곳도 기소 대상에 포함시켰다. 검찰은 지난 6월부터 공정위가 대주주의 차명주식, 계열사 현황 등을 허위신고한 대기업에 면죄부를 준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 150여 건을 수사해 왔다.

공정거래법상 주식보유 현황을 허위신고한 사건은 공정위가 검찰에 반드시 고발해야 하는데 해당 기업에 '경고'나 '벌점 부과' 조치만 하고 사건을 자체 종결한 사안이다. 공정위가 '경제 검찰'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 온 전속고발권 제도를 악용한 사례라는 지적이다.

검찰은 "주식 허위 신고 사건 177건 가운데 11건만 (공정위가) 검찰에 고발했다"며 "151건은 경고 조치로 자체 종결하고 15건은 무혐의 종결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더 나아가 LG와 SK, 효성 등 대기업들이 장기간 반복적으로 계열사 신고를 빠뜨리거나 보유제한 주식을 취득하는 등 범죄 혐의를 밝혀냈지만 기소하지 못한 것에 대해선 "공정위가 제때 신고를 하지 않아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밝혔다.

이쯤 되면 '한 발 먼저 움직이지 못한 게 아니라, 아예 안 움직인 것' 이라는 관전평이 더 옳아 보인다.

공정위와 법무부가 지난 8월 21일 전속고발권 일부 폐지에 합의했다. 올 초 유통3법(유통·가맹·대리점), 하도급법(기술탈취), 표시광고법의 전속고발권 폐지가 결정된 만큼 사실상 전면 폐지에 가깝다는 평가도 나온다. 사실상의 전속고발권 폐지로 공정위와 검찰 간 경쟁 체제가 구축된 셈이다. 검찰과의 경쟁에서 밀려 공정위 폐지론이 불거지지 않도록 '한 발 먼저 움직이는' 공정위의 분발을 기대해 본다.

/이재규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