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 현대시 중요 관심사 돼버려
다양한 문제들과 끝없이 싸우면
더욱 강력한 창작 모티브로 작용
詩 역사뒤로 넘어야 할 산 아직 많아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읽고 쓰는 시(詩)는 현실의 정보 전달에 목표를 두지 않는다. 물론 시라고 하여 현실의 정보나 사실을 전해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령 서양 문학사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진 호메로스(Homeros)의 서사시 '오디세이아(Odysseia)'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귀중한 정보들을 제공해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공주는 하녀들이 빨래하는 것을 손수 도와주고, 오디세우스 왕 또한 농사 때가 되면 밭갈이를 하고 목수 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인다. 호메로스가 살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왕족 또한 육체노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이로써 알 수 있다.
하지만 시의 기능은 이러한 현실의 사실적 세부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의미 있는 현실적 경험을 미학적으로 가공하여 그것을 정서적으로 전달하는 데 있다. 현실을 그대로 인지하기 위해서라면 시보다 차라리 다른 문헌을 살피는 편이 한결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시가 인간이 살아가는 구체적 현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흔히 시를 '현실의 거울'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현실의 구체적 경험이 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시가 다루는 현실 속에는 수많은 권력의 양태들이 존재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개재하는 국가 간 권력 위계로부터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치권력에 이르기까지의 거시적 권력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서 행사되는 미시적 권력 또한 적지 않다. 그런데 권력 주체들은 언제나 자신의 지배 아래 있는 세력을 위해 자신의 힘을 행사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권력이란 본래적인 자기 집중성 때문에 타자들에 대해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자기 동일성을 띨 개연성이 높다. 따라서 권력이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자체는 물론, 법률이나 제도, 암암리에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관념, 여론이나 유행 심지어는 사소한 생활적 관행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을 억압할 수 있다. 물론 인간 사회에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갈등과 충돌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수단으로서의 권력의 순기능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의 삶에 지속적이고 전면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러한 권력의 양상들은 우리의 현대시가 가장 관심을 기울여온 문제 가운데 하나다. 시는 우리의 삶 속에 편재한 권력의 폭력성에 우회적으로 저항한다. 폭력이 남긴 환부를 드러내고 그에 대한 치유의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부당한 권력의 숨겨진 속내를 폭로하고 야유한다. 그리고 한쪽에 떠밀려 있는 소외 그룹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적 타자들을 적극적인 주체로 옹립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권력의 주체와 객체가 타자성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돕는 평화의 상태가 회복되기를 역설적으로 꿈꾼다.
특별히 근대 이후 각성된 개인들이 자기 권리의 영역을 확보하고 권력의 부당한 간섭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일반화되면서 생활 세계에서 행해지는 미시적 권력의 억압이라는 문제는 현대시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가부장적 권력, 남성 중심주의 문화, 장애인이나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가해지는 유형무형의 폭력, 어쩌면 기억에 가해지는 폭력까지 우리가 겪어야 하고 넘어야 할 의제들은 무수히 많다. 이처럼 다양한 문제군(群)과 끝없는 분투를 치러야 하는 우리 시대에, 시의 현실 탐색과 지향의 속성은 더욱 강력한 창작 모티프로 작용해갈 것이다. 오도된 권력과 오래도록 싸워온 우리 시의 역사 뒤로,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