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어르신들 스토리 줄줄이 엮고
그 곳 변천사 들려주는 '경동만두' 사장님
옛 얘기 흘러가지만 터는 그 자리 지켜줘
'이렇게 작은 공간이었나.' 주소지를 가리키는 모바일 폰 약도를 들고 찾아갔을 때 느낀 소감이었다. 여성 연출가가 거의 없던 시절에 포부를 안고 대학생이 되어 극단 '고향' 연출부에 입단한 첫해에 극단 '고향'의 제8회 정기공연이자 나의 두 번째 조연출작품 '늦가을의 황혼'(뒤렌마트 작)을 공연하며 '까페 깐느'와 함께했던 추억은 매우 크다. 대학 수업시간에 스승과 제자로 만나 1969년 창단된 극단 '고향'의 연출부로 인도해 주신 이원경 선생님 덕분에 서울 '까페 떼아트르'와 인천 '까페 깐느'를 요일별로 오가면 공연했다. 극단의 박용기 선생님이 연출을 맡고, 당대 KBS와 TBC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하던 '고향'의 창단동인들, 민욱·곽동현·정운용 선배들이 출연했다.
요즘은 카페라는 말이 흔하게 쓰이고 있지만, 당시 카페는 기존한 다방에 견주어 '신식다방 + 연극', '살롱형 소극장' 등의 개념으로 소개됐다. 서울 명동의 대연각호텔 옆에 극단 '자유극장'의 이병복 대표와 부군 권옥연 화백이 프랑스 유학파로서 1969년에 국내 최초의 '까페 떼아트르'를 만들었는데 '차와 연극'을 꼭 앞에 붙여 표현했고, 그 당시 신문기사들을 보면 '찻집(劇場)'이란 표현을 많이 쓰기도 했다. 1974년 여름, 27세 나이로 '까페 깐느'를 연 이우용씨는 인천 출신으로 '자유극장' 단원이었다. '고향' 단원인 민욱과는 친구사이였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까페 깐느'가 탄생하고 극단 '고향'은 개관 공연을 하게 되었으니, 그 첫 작품은 극단 고향 제6회 정기공연 이영규 작 '적'(강영걸 연출)이다.
세월이 지나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45년의 시간이 흘러 극단 50주년을 앞두고 50년사를 홈페이지에 정리하는 중에 '까페 깐느'와의 소중하고 특별했던 인연을 기록하고 있다. '깐느'와의 추억을 공유하는 극단의 생존자는 강영걸(연출)·정운용(배우) 선배들뿐이다.
가끔 지역 문화예술계 어르신들을 보면 "혹시 1974년에 '까페 깐느'라는 곳에 가보셨어요? 용동 239번지에 있었는데요"라고 묻는다. "어, 그럼. 그 일대가 239번지야. 거기서 연극 봤어, 참 재밌었어!" 인천 토박이이신 백발의 시인 김윤식 선생께서 기억하는 연극의 스토리를 줄줄 엮어내신다. 기억의 끝에서 끊어지는 스토리를 조금씩 거들며 이어가다가 "뒤렌마트가 쓴 '늦가을의 황혼'이에요"라고 했더니 "아. 그렇구나. 그래 외국 사람이 쓴 거야. 마지막 장면에 등장인물이 고층에서 떨어지는 순간 연출은 매우 임팩트를 느끼게 했다"고 회상했다. 선생께선 객석 가운데로 긴 통로를 설치한 무대장치를 그리고 그 위에 배우의 동선을 그리며 설명도 덧붙였다. 설명 후 "제가 조연출한 작품이에요." 오랫동안 잠재우던 추억을 공유하고 나니 새삼 반가웠다.
용동 239번지부터 239-1~6까지를 친절하게 확인해 주고 239번지 변천사를 들려준 또 다른 토박이 '경동만두' 강국봉 사장은 그 터에서 태어나서 65년째이다. 그는 식당을 연 지 36년 됐다는데, '까페 깐느'자리에 '청자다방'이 오랜 기간 있었고 경동기원은 들어 온 지 2~3년 됐다고 한다. 여기서 만두를 사 들고 신포시장을 지나 중구청 방향의 '카페 흐르는 물'로 가니 주인장 안원섭씨가 반겨줬다. 만두를 전하니 방금 경동기원에서 왔노라 한다. 흐르는 물처럼 옛 얘기는 흘러가지만, 터는 그 자리를 지켜준다.
/박은희 연출가·극단 고향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