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칭찬만 않고 험담도 일삼아
정화하자 해놓고 더러운 말 더 써
말이 무서운 올해 이제 한달 남아
더러움 속에서 자기도 보라…
옛날에 굴원(약 B.C.~B.C. 278년)이라는 초나라 사람이 정계에서 물러나 강가에 머물러 있었다 한다. 그때 어부 하나를 만나 세상 한탄하기를, "온 세상이 모두 흐린데 나만 홀로 맑구료. 모든 사람이 다 취했건만 나만 홀로 깨어 있었구료. 이로 인해 추방을 당하고 말았소"라 하였다. 이 어부는 한갓 이름없이 살아가는 이겠지만 굴원의 '고고' 포즈가 마음에 들리 없었으리. 세상에서 물러나 세월의 흐름에 뜻을 맡기는 이는, 저희들끼리 중앙이니 서울이니 자부하는 곳에서 아웅다웅 다투는 꼴 한없이 부질없이 느껴졌으리라. 몇 번 문답 끝에 노옹이 남기고 떠나간 시구가 다음과 같다. 滄浪之水淸兮(창랑지수청혜)/可以濯吾纓(가이탁오영)/滄浪之水濁兮(창랑지수탁혜)/可以濯吾足(가이탁오족). 큰 바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그 물이 흐리면 발을 닦으리. 시원스럽기 짝이 없는 말 같지만 간단치는 않다. 아니, 이 무슨 해괴한 '시류'주의자의 요설이란 말인가? 창랑이라 하면 큰 바다 물이라 할 텐데, 이 시는 왜 강물이라 해도 될 것을 굳이 바다라 했나. '나'는 아무리 커도 작다는 것을 알려주려 한 것일까? 바다 위에 떠 있으면 '나'만큼 작은 것도 없으리니 말이다. 세상이란 가뒀다 풀 수 있는 한갓 강물 따위가 아니요 제 혼자 힘으로는 너무나 감당하기 벅찬 산더미 바다라는 것이다. 그 물을 퍼내어 내 맘대로 깨끗하게 할 수 없고 또 제 맘대로 더럽힐 수도 없다. 곧 세상은 창랑, 큰바다 물, 내가 수초처럼 떠 있는 곳이다.
몇 날 며칠 그 더럽다는 그 한 단어가 자꾸 입안에 맴돌아 어찌할 수 없다. 충청도나 그 이남 사투리에 '더럽다'는 '드럽다'라고 한다. '더'와 '드'가 큰 차이 없건만 하필 드럽다고 하면 정말 더러운 느낌이 난다. 그러고 보면, 십 년도 전에 서울 북쪽 어느 큰 대학교 선생님들을 뵙는데, 송 아무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 입처럼 드런 게 없어"하고, 혼잣말하시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손이니 발이니 하는 사람 몸이 다른 생물 것들보다 깨끗하지 않단 말을 하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입이 더럽다? 딴은 그런 것도 같다. 손발은 온갖 더러운 것 다 만지고 밟은 '도구'지만, 그래도 눈에 잘 보여 늘 씻고 닦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입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거울 보고 이를 닦을 때도 입안은 좀처럼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그 입안으로 사람들은 온갖 것을 쓸어 넣는데, 사람처럼 안 가리고 먹는 짐승도 드물다. 쓴 것, 매운 것, 싱싱한 것, 썩은 것, 냄새 고약한 것, 향기 나는 것, 못생긴 것, 탐스럽게 생긴 것, 이 모두가 입을 통해 사람 몸으로 든다. 그러니 입이 어찌 깨끗하랴.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분의 그 말씀은 사람의 몸에 관한 얘기가 아닌 것도 같다. 사람의 몸의 각 부위는 한 가지 역할만 하지는 않아서 입도 먹는 것 말고 또 한 가지 일, 말하는 일을 한다. 그 입으로 남을 칭찬만 하지 않고 온갖 험담을 일삼는다. 있는 일 갖고 비난만 하는 게 아니요 없는 일 갖고도 더러운 말을 지어낸다. 남자만 더럽게 말하는 게 아니고 여성도 그런 말들을 꾸며낸다. 없는 사람, 낮은 사람, 못난 사람의 말은 차라리 그럴 수라도 있다 하지, 가지고 높고 잘난 사람이 더러운 말도 상급이다. 말을 정화하자며 더러운 말을 하고 우리끼리만 말하자며 더 더러운 말을 한다.
'더럽다'라는 이 한 마디 말이 요즘처럼 실감나게 들릴 때가 없다. 어떻게 사람들이 모여 살며 벌이는 일이 어떻게 이렇게 치사스러울 수 있나. 문제는 창랑의 물만 더러운 게 아니라는 사실. 나도 더럽다 아니할 수 없어, 창랑의 물만 보고 더럽다, 더럽지 않다 할 계제가 아니다. 올해 무술년이라 했다. 심상찮은 바람, 광풍이 분다 했다. 이제 양력으로 한 달, 음력으로 두 달. 말이 무서운 이 해가 언제 가려나 한다. 어느 신문에서 올해의 한자성어를 뽑았다. 왜 '지록위마'는 후보에 없었나. 하지만 명심하라. 무명 어부의 지혜를 배우라. 더러움 속에서 자기도 보라.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