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봄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혔던 산드라 데이 오코너가 1981년 미국 최초 여성대법관에 임명되기 전까지 대법원 판결문 서명란은 '미스터 저스티스(Mr. Justice)'였다. 그녀가 오면서 '저스티스'로 바뀌었다. 남성 중심에 빠져있던 미국 대법원에 오코너는 중도 보수의 신념에 따른 판결로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미국법에서 '9'는 신의 숫자다. 9명의 종신 대법관이 내리는 판결이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지혜의 아홉 기둥'에 비유되는 것은 견제와 균형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연방대법원의 근간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저스티스'라고 불러 주는 것은 미국 사람들의 대법관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정의를 선언하는 최종 판단자로서 대법관은 한 점의 흠도 없어야 한다는 뜻도 된다. 하급심 판사가 자칫 지나칠지 모르는 '정의'를 대법관은 반드시 봐야 한다는 미국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기도 하다. 미국에선 대법관 외 나머지 판사들은 그냥 '저지(Judge)'로 칭한다. 물론 야구 심판도 '저지(Judge)'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법관이 아닌 법관을 모두 '판사'라고 한다. 대법관에게선 그만큼 권위가 묻어난다. 그들이 있는 대법원은 민주주의와 법질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20개가 넘는 국회 인사청문 대상 중에 대법관 후보자의 통과율이 제일 높았던 것은 고도의 도덕성과 자질이 요구되는 만큼 실질적으로 훌륭한 후보자들이 추천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대법관의 인사청문회에서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김선수·노정희·이동원 대법관은 청문회를 하면서 다운계약서 작성, 안철상 대법관(법원행정처장)은 3차례 위장전입 사실이 드러났다.
그제 김상환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이 불발됐다. 김 후보자는 3번의 위장전입으로 실정법을 위반하고, 두 차례 다운계약서를 작성해 탈세를 저질렀다. 청문회에서 김 후보자는 "사려 깊지 못했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말을 가슴으로 들었다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법원이 검찰 수사를 받는다. 사법 농단에 연루된 박병대·고영한 등 두 전직 대법관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되는 초유의 사태도 발생했다. 대법원장 차에 화염병을 투척하는 일도 벌어졌다. 대법원의 신뢰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바야흐로 대법관 수난시대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