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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0일 고려대학교 캠퍼스내에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고려대 경영학과 08학번 학생이 쓴 이 대자보는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안녕하지 못한 서글픈 현실을 사는 이들에게 '안녕한가'를 묻는 27세 대학생의 대자보 여파는 전 세대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마치 들불 같았다. 그 후 우리 사회엔 '안녕들 열풍'이 불었다. 고교생까지 안녕 대자보 대열에 합류했다. 대자보는 잠시나마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이 됐다.

대자보의 역사는 길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벽보를 정치에 적극 활용했다. 조선시대에도 나라에서 붙이는 방문(榜文), 남을 비방하거나 민심을 선동하기 위해 붙이는 괘서(掛書) 등이 있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파리코뮌과 러시아 혁명도 따지고 보면 길거리 벽보에서 시작됐다. 대자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건 1950년대 중국의 여러 정치세력이 붙인 대중선전용에서 비롯됐다. 조직 내부 소식지나 성명서는 소자보,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벽보는 대자보라 칭했다. 문화대혁명 시절 마오쩌둥이 대자보로 홍위병을 선동해 사실상 살육의 도구로 삼았다.

우리나라 대자보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대학 대자보로 광주의 진상, 5공 권력층의 비리 등이 국민에게 알려졌다. 시대의 양심 대자보는 시대 문화로 자리 잡았다. 언론이 통제 당하면서 대자보가 민중저항 매체 노릇을 한 것이다. 대학마다 밤새도록 쓴 글을 사복형사에게 들킬까 봐 새벽에 몰래 붙이고, 또 떼어지는 일들이 수없이 반복됐다. 대자보 내용은 학교 담을 넘어 순식간에 거리로 퍼져 나갔다.

12일 자 경인일보는 수도권 대학가를 중심으로 붙기 시작한 '문재인 왕 씨리즈' 대자보가 전국의 100여 개 대학교로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자보는 문대통령을 경제왕, 고용왕, 태양왕, 기부왕, 외교왕 등으로 빗대면서 주요 정책을 반어법으로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80년대 대자보의 '선언'과 '투쟁'을 벗고 '해학'과 '조롱'으로 무장한 것이 특징이다. 학교마다 미허가 대자보란 이유로 제거하고 있지만, 문 대통령에 대한 20대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대자보가 주는 의미는 매우 상징적이다. 노력해도 절대 열리지 않는 취직의 문, 계급 상승의 사다리가 사라졌다는 절망감에서 비롯된, 어쩌면 기성세대 '꼰대'들에게 보내는 20대들의 분노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