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서 전철역까지 꼭 15분 거리
서둘러 눈길 걷다 할머니에 발밟혀
딸네 다녀간다 뒤따르며 이야기꽃
뛰어봤자 빙판길 겅중겅중 모양새
결국 열차 나란히 앉아 차창밖 감회
이른 아침, 동네는 조용했다. 할머니 한 분을 급히 앞서가려다 발을 밟혔다. "아이고야, 왜 그렇게 뒤에 바짝 붙었댜? 안 아퍼?" "아뇨, 괜찮습니다."
나는 할머니를 앞서 조금 더 속도를 냈다. 뒤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딸네 집에 다녀가는 거여."
뒤를 돌아보았다. 나뿐이다. "아이고, 집을 얼매나 잘 지어놨는지 나오기 싫더라고. 마당도 있고 1층은 딸네 부부 살고 2층엔 손자가 살어. 3층에도 또 누가 살어."
아파트 단지 곁의 상가주택을 말하는 건가.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늦었다. 네에네에, 잠깐 대답한 후 나는 뛰기 시작했다. 뛰어봐야 빙판길이었으므로 겅중겅중하는 모양새였지만. "보일러를 얼마 안 땠는데도 바닥이 절절 끓어야. 아이고, 좋더만. 인테리어 하는 데에 돈을 엄청 썼대."
돌아보니 할머니도 뛰고 있다. 역시 할머니도 겅중겅중. 네에, 나는 웃어 보이고서 다시 뛰었다. "호주머니에서 손 빼! 다치면 어쩔라고 그래. 얼른 손 빼야!"
네에, 나는 손을 빼고 뛰었다. 속도를 더 내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나에게 계속 말을 붙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쩌지. 늦었는데. "우리 영감이 수도국에 댕겼어. 그래서 딸들을 다 공부시켰어. 공부도 얼매나 잘했는지 몰라. 그러니까 잘 살지. 집도 절절 끓고. 우리 영감이 그건 잘했지. 공부시킨 거."
키가 작은 할머니는 계속 뛴다. 겅중겅중. 등에 매달린 작은 배낭이 흔들리고 눈이 그친 토요일 오전은 그리 춥지 않았다.
"호주머니서 손 빼라니까!" 언제 또 내가 손을 넣었나. 냉큼 손을 뺐다. 할머니와 나는 길고 하얀 오솔길을 일렬로 뛰고 있었다. (진짜 오솔길이다. 아직 개발이 덜 된 우리 동네는 아파트단지와 전철역이 전부다.) 숨이 턱턱 닿도록 뛰지도 않고 그렇다고 느긋하게 걷지도 않고 겅중겅중. 내 숄더백이 흔들리고 할머니의 배낭이 흔들리고.
"나는 모란시장으로 가는디." 나는 모란시장으로 가는 길을 모른다. "모란시장 안 가봐서……" "전철 타믄 금방인가?" "저는 잘……" 계속 이럴 수는 없었다. 나는 전철을 놓칠지도 몰랐다. 눈 딱 감고 속도를 냈다. 할머니가 또 불러세울까봐 호주머니에 손을 뺀 걸 다시 확인하고 빠르게 뛰었다. 이제 횡단보도를 건너면 역이었다.
헉헉. 신호등 앞에서 숨을 몰아쉬는데 할머니의 목소리다. "뛰믄 뭘해. 빨간불인데." 빠르게 뛰나 겅중겅중 뛰나 빨간불이었다. 나는 할머니와 나란히 서서 초록불을 기다렸다. "인테리어는 하고 들어갔어?" "아뇨." "왜, 새 집인데 돈 좀 들이지?" "그냥 할 것도 별로 없고……" "전세야?"
초록불이 켜졌다. 이번에야말로 뛸 때다. 4분 남았다. 혼자 사라지기 미안해 할머니에게 당부를 했다. "4분 남았거든요. 이거 놓치면 20분 기다려야 해요. 빨리 뛰세요."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얼지 않은 바닥을 골라 디디며 역 앞 주차장을 지나 승강장으로 뛰어들어갔다. 열차가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기다리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패딩점퍼의 모자를 톡톡 건드렸다. "전세 아니믄 인테리어 한 번 싹 해봐. 집이 아주 번쩍번쩍해져."
할머니였다. 곧 열차가 도착했고 할머니와 나는 나란히 앉았다. 열차 차창 밖으로 할머니와 내가 뛰어온 오솔길이 고스란히 보였다. 저 긴 길을 우리가 줄 서서 뛰어왔구나. 겅중겅중. 아직 2년밖에 안 된 새 집이라 인테리어 할 일은 없는데. 나는 할머니의 딸네 집 실크벽지 자랑을 들으며 모란시장엘 가려면 어느 역에서 갈아타는지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았다.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