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 항복후 원나라에 바치기도
유일 완초장 이상재 선생 후진양성
北도 공예품 명맥 이어 교류 기대
인천 강화도의 특산품인 화문석은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강화에 퍼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 개경 화문석 장인들의 기술이 강화도와 교동 일대로 전파됐고, 천 년 가까이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는 얘기다. 남북 평화의 시대를 맞아 화문석 공예와 관련한 남북 문화교류가 기대되고 있다.
볏짚을 이용한 생활 공예품과 달리 화문석은 지배 계층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고급 제품이었다. 지금은 인천 강화군에서 겨우 맥을 잇고 있다.
강화 화문석은 강화의 논에서만 자라는 순백색의 '왕골'이라는 벼목의 식물을 가공해 만든다. 왕골로 자리나 방석, 소쿠리를 만드는 장인을 '완초장'이라고 하는데, 강화 교동 출신의 이상재(76) 선생이 국가무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된 국내 유일 완초장이다.
그는 현재 강화읍에서 같은 교동 출신의 부인이자 전수조교인 유선옥(66)씨와 함께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강화에 화문석이 뿌리내린 경위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의 강화 천도 시기 왕실에 진상하기 위한 화문석을 강화에서 만들면서 시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몽골에 항복한 뒤로는 고려 왕실이 원나라에 화문석을 바치기도 했다.
'고려사절요'에는 "충렬왕이 낭장(고려 무관 벼슬) 은홍순을 원나라에 보내 화문석을 바치게 했는데, 양반집 자제 25명에게 모두 3등급을 특진하여 벼슬을 주어 보냈다"는 구절이 나온다.
화문석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도 화문석 공예 기술이 내려져 오고 있다. 2006년 한국공예문화진흥원과 북한 대외전람총국이 개최한 남북공예교류전에서 북한은 '개성 화문석'을 비롯한 왕골 공예품을 출품했다.
한국관광공사도 북한 개성의 특산품 중 하나로 화문석을 꼽고 있다. 완초장 이상재 선생은 남북공예교류전과 여러 전통 박람회에서 북한의 화문석 작품을 직접 만났다고 한다.
부인 유씨는 "강화의 화문석은 고려 때 전해졌다고 하는데 북한 역시 화문석과 소품 공예가 전해지고 있다"며 "교류전에서 본 북한의 화문석 돗자리는 강화 화문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지만 바구니 같은 소품은 좀 부족해 보였다"고 설명했다.
현재 이상재 선생 밑에서 10명의 이수자가 완초장 기술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언제 맥이 끊길지 모르는 상황이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하는 수십만 원에 달하는 고급 공예품이다 보니 화문석을 찾는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유씨는 "교동에 살던 어렸을 때만 해도 농번기가 끝난 겨울이면 어느 집이건 왕골을 이용해 소품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화문석이 꼭 필요한 물건도 아니고 공장에서 찍어낸 돗자리가 많이 나오다 보니까 판매가 잘 안 되고 있다"고 했다.
한편, 강화군은 화문석 문화 계승을 지원하기 위해 왕골 재배 농가와 공예인을 지원하는 조례를 내년 제정할 계획이다. 또 송해면 양오리에 건립한 화문석 문화관을 통한 홍보·육성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