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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꼬리 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에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카~/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짝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허허허/명태 허허허 명태라고 음 허허허 쯔쯔쯔/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인용이 길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명태에 버릴 부위가 하나도 없듯, 이 시 역시 하나라도 잘라내면 참 맛이 사라져서다. 1연부터 마지막까지 온전할 때, 그리고 노래로 불릴 때 양명문의 시 '명태'는 영롱한 빛을 발한다. 여기에 곡을 붙인 건 '떠나가는 배' 작곡가 변훈이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열린 '한국 가곡의 밤'에 바리톤 오현명에 의해 초연됐다. 관객의 반응은 냉랭했다. 음악평론가 이성삼의 "이것도 노래냐"라는 노골적 비판에 충격받은 변훈은 작곡가의 길을 포기하고 외무부에 들어갔다. 이 곡이 한국 가곡 최고봉으로 우뚝 선 건 70년대 들어서면서였다. 그후 강산에는 이 곡을 모티브로 '명태'를 작곡해 7집 타이틀곡으로 삼고 이렇게 불러 제꼈다. '피가 되고/살이 되고/노래 되고/시가 되고/약이 되고/안주 되고/내가 되고/니가 되고/그댄 너무 아름다워요/그댄 너무 부드러워요/그댄 너무 맛있어요'.

어린 시절 어머니는 동태찌개를 질리도록 밥상에 올렸다. 다음 날에도 꽁꽁 언 동태를 내리치던 어머니를 보면서 "또 동태찌개군"이라 푸념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지천에 널린 명태는 '시인의 안주'가 될 만큼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이런 명태가 우리 근해에서 완전히 사라진 건 2008년이었다. 기후 탓이 크지만 무분별한 남획이 문제였다.

요즘 명태가 관심을 끄는 건 소량이지만 근해에서 다시 잡혀서다. 정부는 모처럼 찾아온 명태를 보호하기 위해 포획을 금지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이다. 우리는 당분간 우리 근해에서 잡히는 명태가 그리워도 꾹 참아야 한다. 자연은 우리가 훼손한 그만큼을 어떤 방식으로든 고스란히 우리에게 되갚는다. 그때 최소한 노가리는 놔뒀어야 했는데 씨를 말렸으니 그 벌을 지금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국민 명태'의 화려한 부활을 기대해 보자.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