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에서 조연일지언정 '집사'의 역할은 중요하다. 특히 재벌가를 둘러싼 인간의 욕망과 야망, 이들의 비밀을 다루는 드라마에서 집사는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갈등하며 극의 긴장감을 높이는 주요 캐릭터다. 사회성 짙은 영화를 주로 만드는 임승수 감독의 '하녀'에서 윤여정이 맡은 역할이 그런 경우다. 타락한 재벌가에서 철저하게 농락당하는 하녀를 지켜보는 집사 윤여정은 영화의 큰 기둥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집사가 칼을 들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한다면 공포영화나 막장드라마가 되기 십상이다.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는 지난 2010년 영국에서 처음 도입된 제도다. 기관투자가들이 투자한 기업의 주주 가치 증대, 지속 가능한 경영을 위해 기업의 재산을 마치 '집사(Steward)'처럼 관리해야 한다고 해서 붙여졌다. 친구나 삶의 동반자처럼 좋은 분위기 속에서 '주주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집사가 칼을 빼려는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제 '공정경제 추진전략회의'에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 행사해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고 말한 이후다.
재계는 크게 동요하고 있다. 불과 1주일 전 문 대통령이 삼성·현대차 등의 고충을 경청하며 "내가 수소차 홍보 모델"이라고 했던 것과 180도 달라진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날 기업 경영에 과도하게 간섭해선 안 된다는 재계의 말을 대통령이 경청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사회 단체들이 스튜어드십 코드 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졌다고 반발하자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이 나왔다고 한다.
국민 노후자금 637조원을 굴리는 국민연금에게 당장 스튜어드십 코드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 무엇보다 연금의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1.5%의 기금운용 수익률을 기록했다. 국민연금이 손실을 낸 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만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정작 중요한 수익률엔 무관심한 국민연금에 노후자금을 맡겨도 되는지 걱정되는 이유다. 그런 국민연금이 변심해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 로맨스 영화가 순식간에 공포영화나 막장드라마가 될 우려가 커졌다. 칼은 잘 쓰면 약이 된다. 하지만 잘못 쓰면 회생불능의 치명적인 독이 된다는 것을 정부나 국민연금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