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갈등은 왜 여전히 존재할까
일상의 야만·폭력·불의·부패 고통
우리 스스로 걷어내지 못한다면
'찬란한 문화적 삶' 전환 불가능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류 역사에서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의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그 현란함을 벗어나 보면 우리 삶의 실제적 상황에 본질적 차이가 없음을 안타깝게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풍요로움에 비해 삶과 문화가 피폐하고 허무하다면, 왜 그런 것일까. 여전히 내면의 불안과 갈등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헐벗음으로 허덕인다면 우리는 그 100년 동안 무엇을 한 것일까? 대한민국은 지난 100년 사이 역사를 새롭게 썼으며,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발전했다. 그런데 여전한 불안과 갈등은 왜일까. 왜 삶과 사회에는 여전히 허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일까. 지난 시간 대한민국이 이룩했다는 성공은 어떤 것인가. 삶과 문화에서도 성공한 것일까. 아니라면, 그 반쪽의 성공을 넘어서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지금 이 시간은 우리가 이 질문을 마주하고, 그에 대해 대답하고 실천적 대응을 말해야 할 그 순간이다. 이것은 단순히 100년이란 시간이 지났기에 제기하는 물음이 아니라, 촛불을 통해 새로움을 요구했음에도 여전한 이 삶의 황폐함을 벗어나기 위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 정권에서조차 우리는 100년 전의 외침을 되풀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을 느끼고 있다. 점점 더 분명히 민중의 정치적 의사를 재현한다는 국회의 허위와 법의 위선을, 정치 경제적 현란함에 비해 턱없이 역행하는 현실을 접하게 된다. 이제 너무도 분명하게 정치와 행정, 언론과 법을 장악한 그들이 결코 우리가 외쳤던 공의로움과 공동선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지난 역사를 통해 우리는 그들 정치가와 지도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회와 삶의 주체임을 배웠다. 우리 스스로 삶의 의미와 사회적 가치와 올바름을, 경제정의와 법의 공정함을 향해 일어서지 않을 때 이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 100년의 시간이 야만과 폭력에 맞선 고통과 투쟁의 시간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시간은 그 모든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는 문화적 전환의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변혁은 우리 각자에서 시작된다. 일상의 야만과 불의, 부패를 우리가 걷어내지 않으면 결코 가능하지 않다. 노동을 탄압하고 배제하는 사회, 한 줌의 특권을 독점하는 사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자를 몰아가는 문화를 거부하지 않으면 우리의 일상은 지난 시대로 역행할지도 모른다. 다시는 야만과 폭력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기에 그에 맞선 문화와 삶을, 그런 의식과 태도를 우리 안에 확고히 해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던 그 외침을 우리 안의 제국주의에 돌려야 한다. 누군가의 죽음 위에서야 가능한 풍요를, 거짓과 허위로 가득 찬 문화를, 근대화 이후 켜켜이 쌓인 시대의 모순을 넘어서야 한다. 독과점 구조와 위선의 문화를 뒷받침하는 모든 시스템을 바꾸고, 우리 생각과 의식을, 일상 삶을 그렇게 되돌려야 한다. 우리가 그런 주체가 될 때 비로소 현재의 식민성을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원하고 행동할 때 그들의 오랜 결탁과 독점이, 그 허위가 무너질 것이다. 정의와 평화를, 공정을 원한다면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삶을 원한다면 현란함을 넘어 의미와 직면해야 한다. 지성적 성찰은 그렇게 필요하다. 다가올 100년, 문화와 삶의 혁명을 이룩할 때가 다가왔다.
/신승환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