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삼척 정라진 방파제 배경
육촌·사촌들과 키대로 줄 서 '찰칵'
신나게 탔던 외팔이 아저씨 나룻배
해 질 무렵 얼굴엔 늘 짠내가 가득
풍경 그리운걸 보면 난 '깡촌출신'
머리가 하도 빠져 이젠 아예 민머리로 밀어버린 육촌오빠는 일찌감치 호주 이민을 가 회계사가 되었다. 이민은 생각도 않고 유학길에 오른 것이었지만 어찌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오빠는 아담한 타운하우스 마당에 앉아 "내가 이렇게 살 줄 몰랐는데." 아주 살풋 웃으며 내게 말했는데 그것만도 이미 십오 년 전이다. 육촌언니도 오빠를 따라 호주로 이민을 갔다. 교민들을 상대로 하는 미용실이 잘 된단다. 엄마가 임신했을 때 보약을 먹으면 딸 몸매가 자신처럼 되고 만다며, 보약 먹는 임산부들을 최고로 미워했던 육촌언니는 결혼식 날 고모에게 혼이 났다. "미치겠네, 진짜로. 야, 너는 웨딩드레스를 입으려면 다이어트를 해도 모자랄 판에 혼전임신까지 하면 어떡허니? 니가 제정신이니?" 육촌언니는 그때 만삭이기까지 했다. 언니는 얼마 전 딸의 유치원 졸업사진을 보내왔는데,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나는 그 아이가 선생님인 줄로만 알았다. 백인 아이들 사이에서도 우람한 덩치로 단연 돋보였다. 그러고 보면 꼭 당숙모가 임신 중에 보약을 먹어서 언니 몸매가 그렇게 된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 언니는 이제야 마음을 다 비웠다. 언니의 큰아들, 그러니까 내 큰조카는 인서울 입시에 실패했다. 요란한 사춘기도 없이 얌전히 공부만 했는데 그냥저냥 한 지방대에 아들을 보내려니 마음이 오래 쓰라렸던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논술학원비가 제일 아깝네. 꽤 많이 썼는데." 언니가 웅얼거리기에 내가 한마디 했다. "그거라도 했으니 대학 간 거 아냐. 미련 버려." 언니가 대답했다. "그 대학, 논술 안 봤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조카는 신이 났다. 하도 놀아 살이 다 빠졌단다. 안 그래도 말라깽이라 외할머니의 걱정이 늘어지는 판에 살이 빠지다니. 전화라도 걸어 좀 작작 놀라고 해야 하나. 동갑내기 사촌은 이 사진을 보내며 내 딸의 옷 사이즈를 물었다. 손으로 직접 만든 옷을 보내주겠단다. 사서 보낸단 말인 줄 알고 "됐거든!" 거절했지만 만든 거라기에 냉큼 주소까지 불렀다. 원피스나 앞치마를 손수 만드는 사람은 봤지만 티셔츠를 직접 만든다니. 엄마가 머리를 하도 잡아당겨 묶어주는 바람에 그날 나는 좀 골이 났었다. 사진 속 까만 반코트와 빨간 부츠, 아직도 생각난다. 포항 대도국민학교 3학년 2반 반장이었던 나는, 나에게 밀려 부반장이 된 남자아이의 심통을 견디느라 열살이 꽤 고되었다. 학급회의 진행도 자기가 하겠다며 고집을 피워대던 그 녀석은 잘 살고 있으려나. 꼬맹이 사촌동생은 키가 어마어마하게 커졌고 마지막으로 본 게 내 딸이 갓난아기였을 때인데, 그때 나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누나, 이제 4년을 뼈 빠지게 키워도 겨우 얘만큼 되는 거야." 그러면서 자기 아들을 가리켰다. 녀석의 네 살 아들은 모두의 혼을 빼놓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방파제를 뛰어놀다 우리 할머니의 구멍가게로 몰려가 아이스케키 통을 열고 쭈쭈바를 훔쳐먹었고 베지밀도 빼돌렸다. 할머니는 동네 할머니들과 가겟방에 모여앉아 고스톱을 쳤고 아빠는 작은아빠를 따라 부두로 나가 생새우와 오징어를 사왔다. 외팔이 아저씨가 끌어주는 나룻배 삯은 20원이어서 우리는 어른들을 졸라 계속 돈을 타냈다. 정라진에 살고 있는 육촌들과 사촌들은 매일 타는 나룻배를 시시해했지만 언니와 나는 타도 타도 신이 났다. 외팔이 아저씨의 갈고리를 보는 것은 조금 무서웠지만 말이다. 큰엄마는 골뱅이를 솥에 가득 삶았고 엄마는 삶은 옥수수를 식히느라 부채질을 했다. 어느 집에선가 할머니들이 계속 나타나 감자떡을 가져다주고 강냉이죽을 가져다주었다. 하나같이 맛이 없는 것들이어서 나는 생새우만 까먹었다. 파도가 많이 치는 날, 작은아빠네 집 마당에서 놀다 보면 담을 넘어온 파도가 우리의 작은 머리통 위에서 산산이 부서지기도 했다. 그래서 해가 질 무렵이면 우리의 얼굴에서는 늘 짠 내가 났다. 아아, 나는 제대로 깡촌 출신인가 보다. 사진 한 장에 그 풍경이 이토록 그리운 걸 보면.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