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 연휴 중이던 지난 4일 입춘(立春)이 슬그머니 다녀갔다. 24절기의 첫번째 절기인 입춘은 봄의 시작을 알린다. 가을걷이로 쟁여놓은 곡식으로 연명하던 겨울이 끝나고 슬슬 농사준비에 나설 시기이니 농경민족에게는 한해의 시작을 의미한다. 입춘에 한 해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축문을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 눈에 익은 입춘방이나 아파트 위주의 거주문화 때문인지 요즘은 찾아보기 힘들다.
만물이 소생하는 자연의 섭리로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이양하는 수필 '신록예찬'에서 "기쁨의 속삭임이 하늘과 땅,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 사이에 은밀히 수수(授受)되"는 때로 신록을 키워내는 봄을 칭송했다. "성례(혼례)시켜 달라지 뭘 어떡해."라는 점순이의 투정에 그렇잖아도 머슴질에 뿔이 난 데릴사위가 장인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 것(김유정의 '봄봄')도 춘정(春情)에 취한 청춘들의 한바탕 소동이었다.
하지만 인세(人世)의 형편과 시세(時勢)의 기운이 각박하면 봄은 잔인한 계절이 된다. 산업화 직전까지도 이 땅의 보통사람들은 보릿고개를 죽기살기로 넘어야 했다. 봄은 곡식 없는 빈 들판이었다. 나라 잃은 민족에게 봄은 언제 올지 모르는 이상향이었으니,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절규했다. 박정희 사망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유신시대는 끝났지만 민주주의는 유보됐다. 김종필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다. 봄인데 봄 같지 않은, 잔인한 봄이었다.
봄이다. 그런데 나라와 국민의 기운이 겨울을 벗어났는지 의문이다. 정치는 김경수 경남도지사 법정구속 이후 한겨울이다. 경제는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전망은 어둡고 현실은 각박하다. 무엇보다 설 연휴기간 중 열심히 입을 맞춘 북한과 미국의 실무협상 결과가 김정은과 트럼프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열지 불투명하다. 춘래불사춘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양산 자택에 핀 매화를 보며 나태주의 시 '풀꽃'을 떠올렸다고 한다. '너'가 아닌 '우리'를 위해 자세히 보고 오래 보길 바란다.
/윤인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