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결보다 교류협력으로 고통받는 상처 치유
'동방정책 없었다면 동독개혁 불가능' 평가
자유·인권·개방등 국제사회 기준적용 노력

냉전의 전형적 분단국인 우리도 데탕트에 힘입어 1970년 초부터 남북대화를 시작하였으나 김일성 수령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는 북한과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군사정부간의 대결구조 속에서 냉전의 밀월효과를 향유할 수 없었다. 이후 우리의 긴장완화 노력은 유럽보다 무려 20년 늦게 진행되고 만다. 1990년 냉전이 해체되고서야 남북은 기본합의서를 체결하고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다. 북한의 국가성 인정과 특수관계로서의 남북관계를 동시에 규정한 것이다. 동구권 붕괴와 같은 국가붕괴 사태를 겪지 않으려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한 북한과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한미의 대응으로 북한은 냉전 해체기에 처절한 생존에 성공하였다. 동서독이 1970년대부터 시작한 긴장완화와 화해협력이 한반도에서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야 시작될 수 있었다. 이후 10년의 진보, 10년의 보수정부를 거치면서 남북관계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였고 그동안 북한은 핵능력을 고도화하면서 지금의 핵보유국의 길을 걸어오게 된 것이다.
서독의 브란트 정부가 동방정책을 내걸었을 때 서독 내 보수진영의 반대는 극렬했다. 동독 체제의 연장과 통일의 영구적 포기가 반대진영 주장의 골자였다. 그러나 그 당시의 시대적 흐름은 동독 체제를 붕괴시킬 수도 없었고 패전국인 서독이 스스로 통일을 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 오히려 긴장완화와 공존정책을 통해 동독뿐 아니라 동구권 전체의 이완과정을 촉진할 수 있었다. 대결보다는 교류협력을 통해 분단으로 고통받는 동서독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통일 이후 독일 내에서는 동방정책과 같은 긴장완화와 평화정책이 통일에 기여하였는가에 대해 "동방정책이 없었다면 동구권의 개혁이나 동독의 평화운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이 다수의 평가였다. 중요한 것은 당시 동독이 보인 변화이다. 동독은 그토록 원하던 국가성을 인정받으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고 자유, 인권, 개방 등에 있어 국제사회의 기준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인적교류를 허용하고 여행을 자유화하였다. 정치적 박해를 한다는 비난을 받기 싫어서 정치범을 서독에 넘기기도 하였다.
냉전이 해체된 지 30년이 지난 늦은 시점이지만 한반도는 전 세계 마지막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대장정에 들어섰다. 북한의 불법적인 핵·미사일 개발을 이번엔 반드시 좌절시켜야 한다. 북한을 정상국가화시켜 국제사회의 규범을 따르게 하고 다방면의 교류협력을 확대하여 분단의 고통을 치유하고 남북 간 동질성을 회복해 나가야 한다. 자유왕래와 상호 의존성 확대를 통해 공동체적 통일을 추진해 나가면 점진적 통일과정이 완성될 수 있다. 지난해 남북대화를 비롯하여 새해 벽두부터 북미대화도 진행 중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권과 언론, 일반 국민들은 이를 지지하고 성원해야 한다. 앞으로 있을 북미정상회담과 남북대화를 통해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기대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