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 대장 출신이었던 '金'
친일경찰 노덕술에 치욕 결국 월북
베를린대학서 언어학 공부한 '李'
국문의식 세워나가는데 기반 제공
치열했던 '그들의 이름' 간직해야


월요논단 홍기돈2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올해는 3·1운동이 벌어진 지 100년 되는 해다. 영화·텔레비전에서 소개되는 항일투사의 면면에서 나는 그 사실을 실감하곤 한다. 이런 분들은 우리가 마땅히 끌어안아야 하지 않나, 싶었던 사례가 대중들에게 속속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부 전공이 다르기는 하지만, 한국현대문학을 전공한 내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조금이나마 식견을 가지게 된 것은 연구대상이 되는 시인·작가들이 그만큼 치열하게 살아나갔던 덕분이다. 예컨대 저항시인 이육사의 경우를 보자. 조선혁명군정치간부학교 제1기 졸업생인 그는 '연인기'(戀印記)에서 귀국 직전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몇 사람이 모여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을 같이" 하였는데, 그 중 S에게는 "무엇이나 기념품을 주고 와야 할 처지였다." 그래서 그는 "꼭 목숨 이외에 사랑하는 물품"이랄 수 있는 비취인장에 "贈S·一九三三·九·一○·陸史"라고 새겨 선물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S는 윤세주다. 훗날 윤세주는 조선의용대 부대장으로 활약하던 중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일제 측 조서에 따르면, 교장 김원봉과의 의견 차이로 인해 졸업 후 귀국했다고 되어 있으나, 육사가 취조 받으며 내놓은 답변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 일제는 왜 경북 안동에서 체포한 육사를 굳이 중국 북경으로까지 끌고 가서 고문해야만 했을까. 김원봉·윤세주와 절연하기는커녕 물밑에서 연계하여 치열하게 활동한다고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북경감옥에서 육사는 유고시로 '광야'(曠野), '꽃'을 남겼다. 이 두 편의 시는 육사의 죽음 위에서 읽어야만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난다.

1933년 9월 10일 S 등과 가졌던 저녁 모임은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이었다. 1942년 윤세주는 전사하고 말았으니,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던 "내가 바라는 손님"은 결코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육사마저 1944년 고문 끝에 사망하고 말았으니,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 둘 사람조차 부재한 상황이었다. 청포도는 그들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익었던 셈이었다고 할까. 그렇지만 그 청포도조차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을 만큼 제대로 익지는 못했다. 해방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용대 대장을 지낸 김원봉이 친일 고문경찰 출신의 노덕술에게 온갖 치욕을 당한 끝에 결국 북조선으로 넘어가야 했던 정황이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김동리가 이태준과 관계 맺는 양상도 단순치 않다. 1934년 동리는 3대 민간신문 신춘문예의 시·소설 부문에 모두 투고하였으나, '조선일보'에 시가 당선도 아닌 입선에 그쳤을 따름이었다. 실의에 빠진 동리에게 백형 김정설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이태준을 만나도록 한다. 이후 몇 번의 만남을 통해 동리는 이태준에게 소설 창작에 관한 설명을 들었고,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화랑의 후예'가 당선함으로써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구인회 좌장이자 잘 나가는 소설가였던 이태준은 한낱 풋내기에 불과한 동리에게 왜 이토록 공을 쏟았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백산 안희제를 알아야 한다. 백산 안희제는 임시정부 운영 자금의 60퍼센트 이상을 전달한 인물이다. 장학회 사업도 벌였던 그는 김정설, 이극로, 안호상, 신성모, 이태준 등을 외국 유학 보내기도 하였다. 신문사 취업에 번번이 실패하던 이태준은 백산의 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 사장 취임과 더불어 기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태준과 동리(김정설)를 매개하는 인물이 바로 백산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태준이 국문의식을 꼿꼿하게 세워나가는 데 기반을 제공했던 이는 이극로였다.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언어학을 체계적으로 습득한 이극로가 귀국한 뒤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어학회로 거듭날 수 있었고, 여기서 표준어사정위원회를 두 차례 열었을 때 '문장 강화'의 저자 이태준은 각각 전형위원과 기록을 담당하였다.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지자 이극로는 당연히 옥고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극로와 관련이 있는 단체까지 탄압을 피해갈 수 없었으니 대종교가 임오교변을 겪는 과정에 잡혀간 백산은 고문 끝에 1943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해인사사건으로 엮인 김정설도 영어의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조선어학회 사건, 임오교변, 해인사사건은 하나의 뿌리를 가진 세 개의 가지였던 셈이다. 흥미 삼아 덧붙이건대, 동리의 첫 번째 결혼식 주례는 김정설과 호형호제하였던 만해 한용운이었다.

하나하나 되짚어보다가 문득 나 자신을 왜소하게 느끼게끔 만드는 인물들이 있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치열함을 감히 따르지 못하더라도, 그 이름만이라도 간직하는 게 우리의 일이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