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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는 삶의 은유이다. 그래서인지 철학자들은 걷기에 대해 유독 많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던 사상가였던 장 자크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나는 걸을 때 명상을 할 수 있다. 걸음이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정신은 오직 나의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고 말했다. 프랑스 생물학자 이브 파칼레는 "우리의 지성은 우리의 걸음이 잉태한 자식"이라고 썼다.다비드 브루통은 자신을 세계적으로 알린 '걷기예찬'에서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고 설파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걷기를 즐기지 않았다면 '소요학파(逍遙學派)'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걷기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은 2007년 9월 제주에 15㎞의 올레길이 조성되면서부터다. '올레'는 집 앞에서 마을 길까지 이어지는 골목을 뜻하는 제주 방언으로 올레길엔 '끊어진 길을 잇고, 잊힌 길을 찾고, 사라진 길을 불러내' 조성한 20여개 코스가 열려 있다. 올레길의 성공으로 전국적으로 시흥 둘레길, 강화도 둘레길, 남한산성 길, 지리산 둘레 길 등이 잇달아 조성돼 봄 가을엔 몰려든 인파에 몸살을 앓을 정도다.

지구 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걷기에 매력적인 길로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꼽는다. 파울로 코엘료가 직접 걷고 쓴 에세이집 '순례여행'에 소개된 장장 800㎞의 이 길에는 한 해에도 수십만명이 찾아와 걸으며 사색을 즐긴다. 각국마다 이런 길이 있는데 프랑스에는 18만㎞ '랑도네', 미국은 8만㎞ '트레일', 영국의 4천㎞ '풋패스' 일본에는 1천200㎞의 '시코쿠 헨로미치'가 유명하다.

정부가 2022년까지 인천시 강화군에서 강원도 고성군까지의 456㎞의 비무장지대(DMZ) 남측에 동서 횡단 도보 길인 가칭 '통일을 여는 길'을 조성해 '한국판 산티아고길'로 만들겠다고 한다. 2010년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평화 누리길'이 그것인데, 당시엔 생태 파괴가 발목을 잡았다. 희귀 동·식물의 보고인 DMZ가 훼손된다며 환경단체와 야당이 크게 반발했다. 한 야당의원은 국정감사에 DMZ 인근에서 수거한 지뢰를 들고 나와 "지뢰밭에 길을 만든다"며 반대했다. 길은 한번 만들어지면 복구가 사실상 어렵다. 굳이 조성하겠다면, 자연파괴를 최소화하면서 천년을 걸을 길을 만들어야 한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