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용품·식기등 품종 확대
화장품서 '사업 전환' 결심
이 무렵 락희화학은 새로 플라스틱 성형사업을 시작했는데, 동기는 잘 파손되지 않은 화장품 용기의 뚜껑 개발 때문이었다.
당시 국산 화장품 용기의 뚜껑 소재가 유리여서 쉽게 파손됐는데 대용품으로 상대적으로 가볍고 튼튼한 플라스틱 뚜껑을 제조하기로 한 것이다.
제품개발은 주로 구인회의 셋째 아우 태회가 전담했다.
화장품판매로 벌어들인 3억환으로 1952년 9월 동양전기화학공업사를 설립하는 한편 범일동 884번지에 건평 41평의 합성수지공장을 마련했다.
사출기 등을 설치하고 플라스틱제 머리빗과 비누곽, 크림 뚜껑 등을 생산했는데 소비자 반응이 좋아 '럭키' 플라스틱제품은 원가의 20~30배에 팔려나갔다.
>> 동양전기화학 설립
플라스틱 세면기와 식기생산 등으로 품종을 확대하는 와중에서 사업의 중심을 화장품에서 플라스틱 성형으로 전환하기로 결심, 1953년에 화장품사업을 청산하고 동양전기를 락희화학에 흡수했다.
자동식모기를 도입해 칫솔도 생산했는데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아 무겁고 불편한 재래품들은 점차 시장에서 밀려났다.
1953년 11월에는 국내외 판매 및 원료, 기계설비 등의 수입을 목적으로 락희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는데 1956년 반도상사(LG상사의 전신)로 개명하면서 무역업을 강화했다.
또 락희화학은 1954년 5월 미국 Abbe Engineering Co.로부터 치약배합기 등을 도입해 부산 연지동에 전용공장을 마련하고 치약생산도 개시했다.
당시 국내에는 주로 미군 부대를 통해 유출된 '콜게이트'치약과 국산으로는 동아특수화학에서 생산한 '다까키'치약이 있었으나 '콜게이트'치약은 값이 비싸 부유층에서만 사용됐을 뿐 대다수 국민은 왕소금이나 잿물 등으로 양치질하는 상황이었다.
'럭키치약' 또한 출하 직후부터 수요가 급증했는데 1955년부터 군납할 정도로 '럭키치약'의 품질이 일정수준 이상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1955년도 '대한경제연감'에는 자본금 기준 국내 10대 기업 중 럭키화학이 4위에 자리매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美배합기 도입 치약 제조도
럭키화학, 10대기업중 4위
1957년 6개부문 20여종 생산
>> 화학제품 메이커 부상
이후부터 락희화학은 플라스틱성형사업에 특화해 1956년에는 PVC 파이프를 생산했고 1957년부터는 비닐 장판, 폴리에틸렌 필름을 생산하는 등 국내 최대의 화학제품 메이커로 부상했다.
당시 락희화학이 생산하던 제품종류는 다음과 같다.
■ 락희화학 생산품목(1957년 현재)
=▲비닐부문: 비닐시트, 필름, 시트합판물, 스펀지 레자 등 5종
▲사출성형부문: 잡화류, 문방구류, 완구류, 조화류 등 6종
▲압출성형부문: 포장용 필름, 농업용 필름, 경질판, PVC 파이프, 전선 피복, 진공성형제품 등 7종
▲수지합성부문: 요소수지 성형재료, 멜라민수지 성형재료, 석탄산수지 등 4종
▲치약부문: 대형, 중형, 소형 3종
▲칫솔, 스펀지, 브러시 등.
락희화학은 1950년대 후반에 재벌로 도약하기 위한 제반 준비를 완료했다.
설립 10여년만에 기틀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해방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물자부족이 극심했다는 점과 둘째, 대부분 기업이 서울, 인천, 안양 등 수도권에 소재했던 때문에 전쟁의 참화를 입었으나 락희의 생산기반은 부산에 위치한 탓에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는 점, 셋째, 해외원조로 제공된 플라스틱 소재를 원료로 해 값싸고 가볍고 내구성이 뛰어난 생활필수품을 생산한 때문이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