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상동 '시와 꽃이 있는 거리'에서 퇴출
시비 놔둔채 '친일 시를 쓴 시인' 표시했다면
'변절 목도' 교육효과 클수도… 철거 아쉽다
칼날 같은 바람이 부는 매서운 겨울. 들판엔 눈이 쌓여 있고, 연처럼 하늘에 걸려 있는 초승달. 어느 한자도 넣을 수도, 뺄 수도 없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시어(詩語). 마치 겨울 풍경을 찍은 한 장의 사진 같다. 그래서 처연하다. 그날 선생님의 이 시에 대한 해석은 대충 이렇다. "일체의 설명적 요소를 배제하고 고도의 압축과 상징으로 이루어진 상징시다. 짧은 시 형식과 상징이라는 표현 기법을 통해 강렬한 언어 긴장을 이루며 인간 본질의 탐구라는 무거운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정제된 미의식을 드러낸다".
하지만 서정주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오직 시만 가지고 논할 때 그의 이름 앞에는 '살아 있는 한국 시사(詩史)' '시선(詩仙)'이라는 찬사가 붙지만, 친일·친 독재 전력에 이르면 그의 이름은 '다츠시로 시즈오'가 되고, 전두환 생일에 축시를 쓴 파렴치한 시인이 된다. '꽃'의 시인 김춘수는 "미당의 시로 그의 처신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미당의 처신으로 그의 시를 폄하할 수도 없다.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다."라는 말로 그의 이런 전력에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 때문에 시인의 고향에서조차 미당을 내놓고 자랑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비극의 역사가 만들어낸 또 다른 비극인 셈이다.
부천에서 미당 서정주가 퇴출당했다. 부천시 상동 상도중학교 뒤 '시와 꽃이 있는 거리'에 세워져 있던 그의 시비 '동천'이 지난 13일에, '국화 옆에서'가 어제 철거된 것이다. 미당의 시비는 지난 2008년 상동 주민자치위원회가 부천문화사업과 연계해 '시와 꽃이 있는 거리'를 조성할 때 세워졌다. 이곳에는 노천명의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와 주요한의 '샘물이 혼자서'가 있었지만 모두 친일 논란 끝에 철거됐다.
2015년 서정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우린 문단엔 미당 재평가 바람이 불기도 했었다. 그의 시를 아끼는 후학들이 '미당 서정주 전집' 20권을 완간하기도 했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먹히는 듯했다. 하지만 3·1 운동 100주년의 거센 바람 앞에서는 천하의 미당도 버티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시비철거가 결정되자 부천시의 정치권, 시민사회 등에서는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며 크게 환영하고 있다고 한다. 정재현 시의회 행정복지위원장은 자신의 SNS에 "친일 잔재를 없애는 것은 민중에게 서러운 삶을 안긴 엉터리 지도자를 바로잡는 것"이라고 밝혔다고 언론은 전하고 있다.
며칠 후면 3·1 운동 100주년이 된다. 여기저기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3·1 운동의 명칭을 '3·1혁명'으로 변경하자는 말이 집권당 대표 입에서 나오는 상황이다. 물론 친일 시인을 쫓아내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을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를 목적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어버리자 우리 국민들은 환호했다. 그때는 흉물스런 조선총독부 건물만 철거되면 일제 잔재가 모두 사라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건물을 그냥 두고 우리의 아픈 역사를 가르쳤다면 효과가 더 컸을 것이란 자성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철거만이 능사는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미당의 시비도 마찬가지다. 시비는 그냥 놔두고 그 옆에 '친일 시를 쓴 시인' 정도로 작은 표시를 해 두었으면 어땠을까. 우리 언어를 한 단계 승화시킨 시를 쓴 '천재시인의 변절'을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교육 효과는 더 클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당 시비 철거소식이 못내 아쉬운 것이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