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가혹한 탄압으로 보복
'안성사건'으로 남한에서 유일
만세운동 선열들의 정신 이어가며
독립운동 역사 대표적 성지 평가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을 때 안성에서도 독립을 위한 불길이 솟았다. 안성 최초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1일 양성공립보통학교(현 향성초등학교) 교정에서 학생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당시 양성면 덕봉리 출신으로 서울에서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던 남진우 학생과 같은 마을 출신으로 선린상업학교를 다니던 고원근 학생이 고향으로 내려와 3·1운동의 소식을 알리면서였다. 이들은 학생들을 독려하여 함께 만세운동을 불렀지만 교사들에 의해 제지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에 의해 만세운동이 시작되어 전 주민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은 큰 의미를 남겨준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3월 말부터는 양성면과 원곡면에서 주민들에 의해 만세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각 마을 단위로 수십명의 주민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후 결집을 통해 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4월 1일과 2일에 걸쳐 폭발적인 시위로 이어졌다. 주로 비폭력 평화적 시위의 3·1운동 정신이 발현되었으나 다수의 주민들이 참여하면서 조선의 독립에 대한 확신을 갖고 적극적인 실력항쟁으로 이어졌다.
안성의 대대적인 만세운동의 양상은 4월 1일 저녁 최은식, 이덕순, 홍창섭, 이유석 등의 주동자들이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고개(현 안성3·1운동기념관)를 넘어 양성으로 행진하여 양성면 주민들과 연합하면서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약 2천여명으로 구성된 연합시위대는 양성면에 소재한 경찰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투석하고 방화하였고, 이어 일본인 상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하여 파괴하였다. 그 결과 일제의 통치와 일본인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적극적인 실력항쟁을 펼쳐 이틀간의 해방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양성·원곡면의 만세운동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 일제 식민 통치와 불합리한 일본인들의 수탈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실력항쟁의 양상을 보였으나 절대로 인명에 대한 살상을 가하지 않은 것은 독립의 쟁취를 위한 목표에서 나타난 것으로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은 양성·원곡면 만세운동의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일제에 대한 저항은 가혹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원곡면 주민들은 평택의 경부선 철도까지 파괴하려고 모의하였으나 일본군의 출동 소식을 듣고 자진 해산하여 주변으로 숨었다. 일제는 군병력과 경찰을 투입하여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펼쳤으며 그 과정에서 방화와 폭행을 가했다. 그러나 검거가 부진하자 면장을 앞세워 농번기임을 감안하여 경찰서장의 연설을 들으면 사면해 주겠다고 회유하여 내가천리 뒷산에 모이도록 했다. 이를 믿은 주민들은 현장에 모였으나 군병력이 이들을 폭행하고 검거하기 시작했다. 결국 300여명이 안성경찰서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과 신문을 받았다. 그 결과 안성지역 만세운동 참여자에게는 징역 5월부터 최고 12년에 달하는 형이 선고되었고, 특히 단일지역으로는 가장 많은 127명이 기소되어 실형을 선고된 것은 우리나라 3·1운동사에서 최대의 탄압으로 평가된다. 당시 신문에서 '안성사건'이란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보도할 만큼 세간의 관심이 컸던 사건이기도 했다.
한편 일제는 민족대표의 판결문에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황해도 수안 수안면과 더불어 만세운동의 주요지역으로 적시하였다. 이로 안성의 3·1운동이 전국 3대 실력항쟁지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현재 두 곳의 지역은 북한에 위치하고 있어 남한에서는 유일한 실력항쟁지가 안성이라는 점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안성의 3·1운동 역사에 대해 다시 전국적으로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3·1운동 이후 안성인들은 사회운동, 임시정부, 광복군 등으로 이어지며 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갔다. 그 결과 경기도 내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 및 활동하였음을 확인하였고, 한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안성이 대표적인 성지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도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나섰던 선열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해 나가는 것이 3·1운동 100주년과 마주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일 것이다. 안성의 독립운동가가 그토록 염원했던 한국의 봄이 민족의 통일로 이루어지길 바라본다.
/김대용 안성3·1운동기념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