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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 정부가 미국에 파견한 문화사절단엔 만신(萬神·큰 무당) 김금화도 포함됐다. 공연 첫날 무대에 오르려는 김금화의 옷차림을 보고 주미 영사관 사람들이 "나라 망신 시킬 일 있느냐. 무슨 굿이냐. 당장 데리고 나가라"고 난리를 쳤다. 그녀를 데리고 간 고(故)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이 아랑곳 않고 그녀를 무대로 떠밀었다. 신명나게 굿거리를 펼치고 죽기살기로 작두를 탔다. 이번엔 미국 관객들이 춤추고 난리가 났다. 나라 만신, '국무(國巫) 김금화'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후 김금화는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에 대동굿과 진혼제를 선보였고,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선종 직후엔 로마대학 앞에서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백남준, 김대중 전 대통령 진혼제와 세월호 희생자 추모위령제도 주재했다. 2007년 사도세자 서거 245주년을 맞아 화성행궁 앞에서 펼친 진혼제에서는 사도세자와 접신해 "목말라. 목말라"라고 울부짖어 관객들의 마음을 찢어놓기도 했다. 김금화는 오방색의 마술사 내고 박생광의 무녀도 시리즈의 모델이기도 했다. 2004년 용인 이영미술관에서 열린 박생광 탄생 100주년 특별전에서 진혼굿을 벌인 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미국 공연 후 1985년 '서해안 배연신 굿 및 대동굿'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지만, 그 이전의 세월은 그녀의 말(경인일보 2005년 10월 25일) 처럼 "무당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험난했던 인생"이었다. 11살부터 무병을 앓다 14살에 시집에서 도망치고, 17살에 만신이던 외할머니 김천일에게 내림굿을 받아 19살부터 마을 대동굿을 주재했다. 무속을 미신으로 경멸하던 시류 때문에 동란 때는 좌익과 우익의 위협을 받았다. 1·4후퇴 때 고향인 황해도 연백을 떠나 인천 만석동에 자리잡았지만 새마을운동 시절의 사회적 멸시도 만만치 않았다.

서해 어민들의 풍어를 빌어주고, 지역사회의 대동평안을 기원하고, 국태민안을 염원하던 국무이자, 굿을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확장시킨 예인 김금화가 지난 23일 세상 옷을 벗어던지고 영면에 들었다. 이제 혼이나마 황해도 연백 고향 하늘을 날고 있으려나. 마침 미북회담이 곧 열린다. 한반도 운명에 볕이 들도록 나라 만신 김금화의 천상 굿판을 청하면 무리일까.

/윤인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