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년 9월 지팡이 하나, 옷 두 벌, 책 몇 권을 유품으로 남기고 떠난 호찌민의 유언은 이랬다. "내가 죽으면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마라. 소박하고 넓고 튼튼하고 통풍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이 쉬어가게 하라. 방문객이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 나무를 심게 하라." 하지만 당시 권력자 레주언은 호찌민의 유언을 무시했다. 하노이 바딘광장에 영묘(靈廟)를 조성하고 그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영구보존했다. 권력의 심장부 하노이에 호찌민을 두고 그의 영향력을 정치에 이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월남전이 한참이던 1972년 7월, 미국 유명배우 헨리 폰다의 딸인 배우 제인 폰다가 하노이를 방문했다. 반전 운동가 제인은 월맹군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북베트남 대공포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북베트남은 "이게 웬 떡이냐"라면서 이 사진을 반전(反戰) 홍보용으로 대대적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사진을 본 미국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시끄러웠다. 이적행위라는 비난도 일었다. 미국 언론은 그녀에게 '하노이 제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훗날 제인은 "참전 군인에게 상처를 주었다"며 자신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 반성했다.
제인이 하노이를 방문하던 그해, 미군은 12월 18일부터 11일 동안 하노이에 훗날 역사가들이 '크리스마스 대 폭격'으로 기록한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북베트남은 협상장에 나와 미국과 1973년 1월 27일 파리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에 따라 미군은 철수했지만,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은 패망했다. 훗날 티우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키신저는 우리도 모르게 공산주의자들과 협상했다. 미국은 국내 문제 해결을 위해 베트남을 버리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현실정치에서 일어나는 실수가 아니라, 미국이 고의적으로 옳지 못한 정책을 선택한 결과였다." 티우는 남베트남이 '버리는 패'였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노이는 1958년과 1964년 김일성이 호찌민과 두 번 회담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의 현장에서 오늘 내일 이틀간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회담 성공을 기원하는 50만 개의 꽃과 나무, 4천개의 꽃바구니로 지금 하노이가 꽃의 도시로 변했다고 한다. 회담 후 '하노이 선언'이 발표될 것이다. 그저 그랬던 '센토사 선언'보다 우리가 더 납득할 수 있는 비핵화가 담긴 선언이 나오길 바랄 뿐이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