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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을 모르고 예배당에 모인 군중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문을 밖과 안으로 잠그고 못까지 박은 후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예배당을 휩싸자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뛰어 나오려고 아비규환 생지옥을 연상케 하였다. 다행히 뛰어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밖에서 대기하던 군인이 총으로 쏘아 죽였다'. 단어 몇 개만 지우면 마치 유대인 학살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1972년 출간한 '독립운동사-3·1 운동사'는 100년 전 발생한 '제암리 학살사건'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3·1운동과 관련된 일제의 만행 중 가장 잔인했던 일로 꼽힌다.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일본 제78연대 소속 군인들은 1919년 4월 15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모아 놓고 불을 질러 23명을 학살했다. 이들은 인근 화수리에서도 만행을 저질렀다. 이 천인공노할 사건은 영국계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와 AP통신 조선 특파원이었던 앨버트 테일러 기자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는 스코필드 박사가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이유이기도 하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일본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본 영문학자 사이토 다케시는 '어떤 살육 사건'이란 시를 통해 '돌연히 울린 총성 한 발, 두 발/ 순식간에 교회당은 시체의 사당/ 그것도 모자라 불을 들고 덮치는 자가 있었다'며 제암리 학살을 고발했다. 지식인의 자성의 소리가 높아지고 여론이 악화하자 아리타는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하지만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아리타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제 일본 기독교인 17명이 제암리 교회를 찾았다. 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학살사건을 사죄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일본의 과거 침탈을 깊이 사죄합니다. '이젠 됐어요'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 사죄하겠습니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회 바닥에 엎드려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방문단 대표 오야마 레이지 목사는 "주여, 우리 일본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민간인의 이런 행동과는 상반되게 일본 정부는 사과와 반성은커녕 이미 이뤄진 과거의 사과조차 부인하고 있다. 3·1 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 100주년을 맞아 지금 귀를 열고 일본인 사죄단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하는 것은 바로 아베 총리일지도 모른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