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경찰 신경 건드린 '독립운동의 한 방식'
3월 30일부터 면사무소 습격등 본격 시위
안성읍내 만세운동 시장 발달했기에 가능
안성읍내 3·1운동에서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안성의 자산가들이다. '매일신보' 3월 11일자의 '삼일 만세운동의 후속보도 안성편'에서 "요사이 조선인 자산가들은 내지인(일본인)에게 빌려준 집과 땅을 내어놓으라고 핍박을 하던 중이라더라"라고 안성 자산가들의 동향을 보도했다. 안성지역 최초의 3·1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인 3월 11일 이전에 안성의 자산가들은 경제적으로 일제를 압박한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애국심의 발로일 수도 있고, 일본이 패망하거나 일본인들이 빚을 갚지 못하고 일본으로 도망할 경우를 가정한 경제적 이유에서 일 수도 있다. 안성의 자산가들은 3·1운동으로 인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거나 적어도 일본인들이 빚을 못 갚을 만큼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일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며, 그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제 경찰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확실하게 간주하고 있었다. 3월 9일의 '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10보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어 안성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심각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안성의 자산가들이 보인 행동은 일제 경찰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 독립운동의 한 방식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후 안성에서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한동안 만세운동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다 3월 28일 읍내면 동리에 거주하는 서순옥이 주민 20여 명과 함께 산에 올라 만세를 부르면서 다시 촉발되었다. 본격적인 안성읍의 만세운동은 3월 30일부터 시작하였다. 약 300명의 군중이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유리창을 파괴하고 군청에 몰려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주모자 3명이 검거되고 시장의 각 상점은 아침부터 폐점이 되었다. 당시 '매일신보' 4월 3일자에는 "30일 오후 7시쯤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시작해 석정리, 도기리, 장기리, 동리, 서리 주민 1천여 명이 안성경찰서 앞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군청으로 들어가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31일에는 오후 4시쯤 안성조합 기생일동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그날 밤 7시 반쯤에는 군중 약 3천명이 등에 불을 켜고 시위를 하였다"고 그날의 상황을 기록하였다.
이상을 종합한 안성읍내 만세운동의 특징은 첫째, 경기구를 날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서 불특정 다수를 만세운동에 동참시켰다는 것이다. 둘째, 자산가들이 자본으로 일본인들을 압박하는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며, 마지막으로 여성들인 기생들이 만세운동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이러한 점은 안성이 조선시대부터 시장이 발달하여 사람과 자본이 많이 몰리는 큰 시장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홍원의 안성맞춤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