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대신시절 을사늑약 주도 '오명'
원위치후 '친일 안내판' 설치안도
제3의 장소 이전… 조사·평가 필요
'을사오적' 박제순의 공덕비가 철거 후 14년 동안이나 대책 없이 방치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공덕비 처리 문제와 관련한 논란이 재점화될 전망이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 관료 박제순(1858~1916)은 1905년 11월 17일 오늘날 외교부장관 격인 외부대신으로서 주한일본공사 하야시와의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1888년 5월부터 1890년 9월까지 2년 4개월 동안 인천부사를 지냈는데, 1891년 8월 인천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인천 향토사학자 이훈익 선생이 펴낸 '인천금석비명집'은 박제순의 공덕비가 높이 1m35㎝에 너비 55㎝크기로 '행부사박공제순영세불망비(行府使朴公齊純永世不望碑)'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인천부사 박제순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의미다.
공덕비는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을 때 세우는 비석으로 선정비(善政碑) 또는 송덕비(頌德碑)라고도 한다. 마을에서 잘 보이는 고개나 관청 앞에 주로 세워졌다고 한다.
박제순의 공덕비를 비롯한 역대 인천부사들의 공덕비 18기는 원래 인천향교 앞에 있던 게 아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대전을 보면 관교동, 문학동 일대에 흩어져 있던 인천부사 공덕비는 1949년 옛 도호부청사가 있던 문학초등학교 앞으로 한데 모여 '비석군'을 형성했다. 1970년대 지금의 자리인 인천향교 앞으로 다시 옮겨졌다.
광복 60년을 맞은 2005년 친일파의 대표인 박제순의 선정비가 인천향교 앞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인일보 보도를 통해 공론화되면서 '철거'와 '이전', '존치 후 기록' 여론이 일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기도 전에 일부 시민단체가 철거 퍼포먼스를 하면서 인천시를 압박했고, 인천시는 그해 12월 15일 중장비를 동원해 박제순 공덕비를 뽑아 인천향교 옆에 있는 인천도호부청사 담장 구석으로 옮겨졌다.
향교 옆 인천도호부청사는 과거의 모습을 재현해 2001년 새로 지어진 건물이다. 부직포에 덮여 밧줄로 묶인 채 담장 아래에 처박힌 박제순의 공덕비는 그 이후로 14년 동안 아무런 처리 논의 없이 방치돼 왔다.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박제순의 공덕비의 존재가 다시 수면으로 드러나면서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공덕비를 다시 원래 자리에 두고 그의 친일 행적을 기록한 안내판을 세울지와 제3의 장소로 옮길지 등 14년 전 제기됐던 방안을 중심으로 다양한 처리 방법이 논의될 전망이다. 이와 함께 인천향교 앞에 세워진 비석군 현황과 주인공에 대한 조사·평가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