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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귀재 '안톤 루빈시테인'은 앵글로 색슨의 콧대 높은 자존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영국인이 대문자로 쓰는 유일한 글자는 나(I)이다. 이것은 그들의 민족성을 가장 뚜렷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유대계 러시아 출신인 그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연주여행을 하면서 영국인들이 지나치게 '아이'를 내세우는 게 싫어서 그랬는지, 영국인들의 그 '자만'이 부러워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쓰라린 역사를 떠올리며 선조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는 1960년대 서구로부터 가장 열렬한 환호와 칭송을 받은 대 피아니스트였다. 끊임없는 귀화 요구에 흔들리지 않았던 그는 낳아주고 키워준 소비에트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71세였던 1986년 그는 자동차 한 대에 몸을 싣고 당시 레닌 그라드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대륙을 횡단하며 작은 도시와 시골 마을을 찾아 순회연주회를 열었다. 시골성당의 낡고 조율이 되지 않은 피아노도 그의 감동적인 연주를 막지 못했다. 이런 '마을연주회'가 100회를 넘었다. 언제는 스무 명 앞에서도 연주했다. 자신들을 찾아준 고마움과 그의 음악에 감동한 마을사람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우리의 피아니스트 백건우도 25년째 지방을 찾아가 연주회를 열고 있다. 거기에는 섬도 포함되어 있다. 2011년 9월 연평도에서 시작한 첫 섬 연주회는 관객들이 둘러앉거나 일어선 채 자유분방하게 대가의 공연을 관람해 신선함을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악기 등 조건이 갖춰진 곳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음악은 청중에게 잘 전달됐다. 섬마을을 찾아 자연으로 돌아가 그 속에서 한국적인 속살을 찾고 싶었다."

백건우가 지방 순회 연주회를 시작한다. 이젠 사통팔달 길이 뚫려 지방이라 하면 그곳 분들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수원 인천을 제외하곤 거장을 쉽게 만나지 못하는 곳이라 이번 '백건우 & 쇼팽' 연주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 16일 군포, 17일 여주, 19일 과천, 20일 광명, 30일 수원, 4월 13일 인천, 20일 안산으로 이어진다. 강행군이다. 백건우는 리히테르처럼 자신에게 큰 보상이 돌아오지 않아도 끝까지 궁극을 추구하는 장인 정신의 소유자다. 헌신을 통해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는 이 '연주의 구도자'를 보노라면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