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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이 하고 나면 며칠간 후유증
대체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 '긍긍'
관계지속 행위 피할 도리가 없다
상처 입히거나 받지 않는 일 불가능
주지도 받지도 않는 일이 최선일까

에세이 박소란2
박소란 시인
"말이 별로 없으시네요"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내성적인 탓인지, 언젠가부터 나는 으레 말수가 적은 사람, 과묵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전에서 '과묵하다'를 찾아보니 '말이 적고 침착하다'는 제법 고상한 풀이가 나온다. 나쁘지 않은걸,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께름칙한 기분이 드는 건 그 속에 답답하다, 지루하다 같은 뜻도 아울러 담겼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좀처럼 이 과묵을 포기하지 못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 나 역시 가끔은 수다쟁이가 된다. 친구가 직장 상사 흉을 볼 때나 먹고사는 일을 염려할 때면 맞장구를 치며 목소리를 높이고 만다. 부러 엉뚱한 얘기를 꺼내 누군가를 웃게 하기도, 의도치 않은 독설을 뱉어 누군가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초면의 누군가를 만날 때는 상대가 너무 어색해하지 않게 실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하는데, 이는 물론 어디까지나 직장인으로서 몸에 밴 일종의 제스처다. 상대도 곧잘 눈치채고 마는.

어쩌다 말을 좀 많이 하고 돌아온 날이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유증이 며칠간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내가 한 말들을 머릿속에 열거하며 대체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 긍긍하는 것이다. 그저 우스개로 던진 말을 그가 오해하지는 않았을지, 그 말이 그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지 하는 걱정은 나는 왜 겨우 이런 사람인지, 이런 말을 지껄이는 사람인지 하는 자괴감으로까지 이어진다. 하물며 말을 두고 이럴진대 대체 글은 어떻게 쓰는 거죠? 묻는다면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 너무나 괴롭다는 말밖에는.

최근 한 선배는 지나는 투로 가볍게 그러나 실은 엄하게 나를 책망했다. "그때 술자리에서 말이야, 네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어. 평소의 너답지 않았달까." 순간 나는 뜨끔했다. 그렇지 않아도 바로 그 '그런 말'이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있던 참이었다. 후배의 난해한 패션 센스를 두고 여럿의 장난 어린 놀림이 오가는 가운데 나도 농담 삼아 한 마디 거든다는 게 그만 도를 지나치고 말았다는 생각. 그러나 선배가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하고 말한 순간 나 또한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 묘한 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날 그 자리에서 나는 과연 합당하고 품위 있는 말만 들었나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수많은 말들 속에 나 역시 크고 작은 불쾌감을 겪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는 내게 더 심한 말도 했다고! 나도 같이 응수했을 뿐이야. 고작 그 정도 말도 나는 해선 안 되는 거야?"라는 말이 속에서 들끓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엎질러버렸다는 자책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후 한동안은 어느 때보다 입을 굳게 다물고 지낸 것 같다.

관계를 지속하는 한 말을, 말을 하고 듣는 행위를 피할 도리란 없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늘 그렇듯 이런저런 말들이 난무하고, 그 속에는 선의를 빙자한 폭력과 농담을 가장한 힐난이 가득하다. 거기서 빚어진 상처는 뜻 모를 웃음 속에 번번이 묻혀버린다. 집으로 돌아간 뒤 혼자 조용히 꺼내어 들여다볼 뿐. 서글프다. 말이라는 건 지극히 섬세하게 가다듬어져야 마땅할 테지만, 종내 그 100%의 상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말이 있는 한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말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 일, 그런 일이 최선일까. 말을 버리고 사람을 버리는 일. 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런 한편, 이 모든 것과는 별개로 가끔은 정말이지 말을 잃는 순간이 있다. 기꺼이 잊는 순간이. 깊이 애정 하는 사람과 마주할 때인데, 그때는 나도 모르게 입의 존재를 망각하게 된다. 대신 커다래진 귀가 오롯이 남는다. 더, 조금 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하는 일보다 듣는 일에 이 귀한 시간을 써야 한다고, 마음은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이다.

/박소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