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감각 없으면 사용 드물고 사라져
훌륭한 작가들 없어지는 말 되살려
미학적 변형 거쳐 예술적으로 승화
창조적인 언어 만들어 내는 역할
가령 사계절을 뜻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당연히 평등한 위상을 갖추고 있지만, 합성어나 파생어를 만들면 어울리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보통 봄이 오면 '새봄'이라고 하지만 우리 말에 '새여름', '새가을', '새겨울'은 없거나 거의 쓰지 않는다. 아마도 봄만 '새로움'에 어울린다는 언중들의 공통감각이 그러한 선택적 불균형을 낳았을 것이다.
반면 일부 명사 앞에 붙어 '한창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한'을 붙여 파생어를 만들면 '한여름'이나 '한겨울'은 자주 쓰는 데 비해 '한봄', '한가을'은 잘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여름과 겨울은 심리적으로 길고 또 더위와 추위의 정점을 표현하는 말이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봄과 가을은 비교적 짧게 지나가는 과정적 느낌을 주기 때문에 '한'을 붙일 정도의 정점은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 현상이나 사물에 계절을 붙여보아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계절을 뜻하는 '철'을 붙여보면 봄철, 여름철, 가을철, 겨울철 모두 평등하게 많이 쓴다. 이르거나 늦은 느낌을 주려는 초봄, 초여름, 초가을, 초겨울도, 늦봄, 늦여름, 늦가을, 늦겨울도 그렇다. 그런데 비나 눈, 바람 같은 것을 붙이면 다른 현상이 나타난다. 자연 현상이나 사물은 대체로 봄에 기지개를 펴고 여름에 절정을 보이다가 가을에 소멸하기 시작하여 겨울에 잠드는 형상을 많이 보이기 때문에, 모든 자연 현상이 활력을 보이는 여름은 그것을 특화하여 지정하는 경우가 드물다.
가령 봄바람, 가을바람, 겨울바람은 많이 쓰지만 굳이 여름바람은 많이 쓰지 않고, 봄비, 가을비, 겨울비도 낭만적으로 다가오지만 여름에 비가 많이 오므로 여름비는 따로 부르지 않는다. 눈의 경우는 거꾸로 겨울눈이라는 말이 없고 대신 '봄눈'이 있다. 여름에는 아예 눈이 안 오니 여름눈은 없을 테고, 가을눈도 있을 법한데 별로 쓰지 않는다. 봄눈은 한자로 '춘설'이라 하여 한 해를 축복하는 서설로 여긴 적이 많다. 정지용의 명편 '춘설(春雪)'도 있지 않은가?
"문 열자 선뜻!/먼 산이 이마에 차라"라고 시작하는 이 작품에 대해 이어령 교수는 "옛시조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같은 한시의 상투어들은 봄눈이나 꽃샘추위를 한결같이 봄의 방해자로서만 그려낸다. 그러한 외적인 '손발의 추위'를 내면적인 '이마의 추위'로 만들어낸 이가 시인 정지용"이라면서 '춘설'의 첫 구절이 천하의 명구라고 감탄한 바 있다. 만일 이 작품이 겨울에 내린 눈을 대상으로 했다면 그 파생적 감동은 훨씬 덜했거나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춘설이란 말은 거의 쓰이지 않고 '봄눈'은 아직도 우리 귀를 울리고 있다. 옛적에 봄꽃 피어나는 순서를 뜻하는 '춘서(春序)'라는 말이 있어 매화에서 시작하여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 철쭉이 피어나는 차례를 가리킨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러한 순서가 물리적으로 확연하지 않아 이 단어도 점점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말은 마치 화폐와 같아 이미 언어공동체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온 것을 다시 쓰는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흡수하고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좋은 작가들이야말로 선행 언어들을 흠모하고 훈련하여 거기에 일정한 미학적 변형을 가하여 그것을 예술적 차원에 놓은 이들이라고 갈파하였다. 지금도 어디선가 말은 만들어지고 변형되고 사라져간다. 공통감각에 안 맞는 말은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공감을 얻은 말들은 지속적으로 퍼져만 간다. 그러니 우리가 쓰는 말도 무한경쟁 속에 살아남은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훌륭한 작가는 사라져가는 말을 되살려 그네들에게 일종의 '인저리 타임(injury time)'을 주어 그 시간 동안 가장 아름다운 결승골을 넣게끔 하는 역할을 한다.
위대한 작가가 언중들에게 가장 낡은 말을 새로운 공통감각의 차원으로 건네는 창조적 순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