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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야간산책 다른 세계에 온듯
로키산맥 사진전 보고 강렬한 잔상
두풍경 힘든 나를 보듬어준것 같아
日 애니메이션속 '짝사랑 선배' 처럼
나도 봄 길목에서 알짱거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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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문화평론가
창경궁에 다녀왔다. 경복궁과 덕수궁은 가 봤어도 창경궁은 처음이었다. 위엄 넘치는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으로 기억되는 덕수궁과 달리 창경궁은 아기자기했다. 비가 오락가락하고 바람이 쌩쌩 부는 날씨 탓인지 발 디딜 틈 없다는 야간개장 시간인데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기대했던 '궁궐에 내려온 보름달' 행사는 끝났고 개장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으로도 충분했다. 궁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도로의 소음조차 거의 들리지 않아 이곳이 도심 한복판이라는 걸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어둑어둑한 봄 저녁, 따스한 불빛이 새어나오지만 누구도 살지 않는 오래된 건물들이 나직하게 엎드려 있고, 낮은 담장 밖으로 우뚝 솟은 서울대병원과 병원을 밝히고 있는 조명들이 생경하게 보였다. 바깥의 풍경과는 상관없이 궁은 고즈넉했고, 잘 관리된 나무들이 위풍당당하게 때로는 포근하게 눈에 담길 때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야간 개장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두운 편이라는 이 오래된 궁 안에는 인공의 빛이 드물었기에 곧 어둠에 익숙해졌다. 사람보다는 나무를 고려한 간접 조명, 여기저기 세워둔 경광등의 형광 불빛만이 길을 비췄다.

누구도 없이 일행과 나, 둘만이 걷고 있을 때였다. 춘당지 옆 소나무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오래된 나무들이 흔들리며 바람 소리를 냈고, 나무들의 소리를 따라 지나가는 바람이 생생히 느껴졌다. 머리는 온통 헝클어졌고 청사초롱을 든 손이 시릴 정도로 거센 바람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 바람이 나를 쓰다듬고 간 느낌이었다. 나무들은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려주고 바람은 나무와 나를, 나무와 나무 사이를 흔들고 지나가고… 마치 나무와 바람이 함께 힘을 합친 것 같았다. 건물 사이로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바람소리 말고 장소를 휘감듯, 자유롭게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들은 게 언제였던가 싶었다. 나도 모르게 제자리에 멈춰 숨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들이마셨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다. 검은 머리 아가씨와 그녀를 좋아하는 나의 하룻밤 모험담을 담은 영화다. 영화 속 아가씨는 현실과 상상이 뒤섞인 것 같은, 뒤죽박죽인 밤의 한가운데를 마구마구 걸어 다닌다. 교토의 기묘한 하룻밤을 경험하는 이 아가씨의 하룻밤처럼, 창경궁에서의 우연한 산책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다른 세계로의 여행처럼 느껴졌다. 청사초롱 속 LED 등의 빛을 따라 돌아다닌 시간, 대온실에서 나눈 별것 아닌 일상의 대화는 물론, 벌어질락 말락 하는 꽃망울의 색깔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조차 아쉽기보다는 감질나서 즐거웠다.

창경궁에 가기 며칠 전, 사진으로나마 로키 산맥에 다녀왔다. 로키 산맥에 빠진 작가가 트레킹 하며 찍은 사진전을 관람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보러 갈 생각 없이 점심 먹고 시간이 좀 남았기에 어슬렁어슬렁 들렀던 전시였다. 공들여 찍은 사진은 멋졌지만 아주 특별한 예술작품은 아니었다. 평소였더라면 제대로 보지도 않고 지나쳤을 텐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장엄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로키의 대자연 때문이었을까? 10분 남짓 전시장에 머물렀을 뿐인데, 사무실에 돌아오고 나서도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로 강렬한 잔상이 남았다. 그런 멋진 사진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당장 내 컴퓨터 화면에도 깔려 있는 종류의 사진인데 왜 그렇게 마음이 흔들렸을까?

창경궁에 다녀오고 나서야 나도 몰랐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 자신이 모른 척 외면해버린 내 마음의 힘든 부분을 로키 산맥의 풍경이 한 번, 창경궁의 바람과 풍경이 또 한 번 어루만져 줬을지도 모르겠다고…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천진난만한 검은 머리 아가씨를 남몰래 좋아하는 선배는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최대한 그녀의 눈앞에서 알짱거리기' 작전을 이어간다. 나도 올해는 봄이 가 버리기 전에 '최대한 봄이 오는 길목에서 알짱거리기' 작전을 수행해보려고 한다. 늦게 피는 만큼 더 아름다운 자유공원의 벚꽃이 만발할 날이 다가오고 있기도 하거니와, 봄은 짧고 누릴 시간은 많지 않으니.

/정지은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