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련 은사님 열강듣고 '시인의 길' 선택
첫 시집 보내드렸을 때 빨간 줄 첨삭 '뜨끔'
열정·절제 인생 큰 영향… 만수무강 기원
예부터 군사부일체라고 해서 스승을 높이 받들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상전벽해라고 했던가. 요즈음은 반대로 학생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된다는 자조적인 말을 듣기에 이르렀다.
나는 한평생 시를 쓰는 시인으로 살고 있다. 내가 문학을 택하게 된 것도 나를 가르쳐주신 은사님들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작문시간에 동시를 썼다.
먼 산 머리 아지랑이 아른거리고
뒷동산 수양버들 무거운 듯 늘어지면
앞 개울가 엄마 찾는 송아지 음매 음매애
'봄'이란 제목의 동시였는데 담임 오수척 선생님께서 참 잘 썼다고 칭찬해 주시며 너는 먼 훗날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6·25 직후라 학교는 불타 천주교회당에서 공부를 했다. 밤이면 램프를 켜놓고 밤이 깊도록 선생님께서 열심히 지도해주셔서 그 당시 세칭 일류 중학교에 여러 명이 합격하였다.
중학교 때는 도원희 선생님으로부터 시를 공부하게 되어 어렴풋이 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김윤식 선생님과 전희련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김윤식 선생님은 얼마 후 대학으로 가셔서 문학평론가로 활동하시다가 작년에 별세하셨는데 금년에 한국문학관에 30억원을 기증하셨다.
1950년대 말에는 교내 웅변대회를 비롯하여 많은 웅변대회가 있었다. 전희련 선생님과 학교 대표로 도대회 웅변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 선생님은 "오늘 출장비가 총 얼마인데 왕복 버스비, 점심 짜장면 값 빼고 남은 돈"이라며 선생님께서 내 주머니에 넣어 주셨다.
봄 소풍을 전교생이 용주사로 갈 때 황구지천을 건너야 한다.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업어서 건네주었다. 그런데 전 선생님은 몸소 바지를 걷어 올리고 구두를 들고 건너셨다. 소풍 때는 선생님들의 도시락을 학생들이 준비해 오곤 했는데 전 선생님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셨다.
선생님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이라고 하셨다. 부친께서는 공무원이셨고 가정은 비교적 부유하여 서울로 혼자 유학을 왔는데 6·25전쟁으로 고향에 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하셨다.
사실 내가 시인의 길을 택한 것도 전 선생님의 국어시간 열강 때문이다. 김소월의 시 '금잔디', '진달래꽃', '산유화' 등등을 가르치실 때 신들린 무당이 작두를 타신 것 같았다. 그리고 사르트르, 카뮈의 실존주의에 대하여도 말씀해주셨다. 내가 '이방인', '전락', '구토'를 탐독하게 된 것도 선생님 덕분이다.
우리 고교시절에는 가을이면 학교마다 종합예술제가 있었다. 유치진 원작을 선생님이 윤색하여 '사육신', '마의 태자'를 연출하셨다. 학교 수업을 마친 후 열심히 연극을 지도하시고 논길을 걸어 집에 가실 때는 늘 지쳐서 어지러웠다고 훗날 말씀하셨다.
내가 졸업 후 대학에 다닐 때 선생님은 서울로 전근하셨다. 내가 첫 시집을 보내드렸을 때 잘못된 곳을 빨간 줄로 첨삭하여 되돌려 보내주셨다. 뜨끔하였다.
선생님은 퇴임 후 수원 영통으로 이사하여 살고 계신다. 오산역 광장에 시민들이 뜻을 모아 내 시비를 세워주었는데 선생님께서 와보시고 시비가 너무 크다고 전화를 하셨다.
선생님은 이제 97세로 휠체어를 타고 계시다. 선생님의 그 열정, 절제, 겸손, 배려는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푸르른 오월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오월의 태양처럼 빛나는 선생님의 만수무강을 삼가 엎드려 기원드린다.
/조석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