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 정부에 맞서 아일랜드 공화국군이 독립 전쟁을 일으킨 때가 1919년 1월 21일이다. 그로부터 40여일 후인 1919년 3월 1일 식민지 조선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서로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나라들인데, 뭔가 공통분모가 엿보인다. 아일랜드 독립전쟁 후에 아일랜드가 아일랜드 자유국과 북아일랜드로 분리된 것도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두 나라에 걸쳐 있는 또 하나의 기록이 눈길을 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임시정부를 지원한 비밀조직과 인물들의 기록을 담은 책자를 발간한다고 한다. 항일투쟁을 하다 일본 법원에서 재판받은 기록(판결문)을 분석해 임시정부가 국내에서 펼친 활동과 임시정부를 지원한 다양한 활동을 소개한다는 것이다. 이 책자는 추후 누리집(http://www.archives.go.kr)에도 게재될 예정이다.
이같은 내용으로 국가기록원이 낸 보도자료를 훑다 보니 색다른 이름이 눈에 띈다. 李東輝, 朴容萬 등 한자로 표기된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유일하게 일본어로 쓰인 이름이다.임시정부 의정원 및 대한청년단 등을 조직하고 군자금, 군수품 등을 모집한 혐의로 구속된 독립운동가 16명에 대한 판결문(고등법원, 1924.3.12)에서다. 'ジㅡ. エル. シヨウ'(G.L.쇼). 그가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다. 자료에는 '쇼가 만주에서 경영한 무역회사 이륭양행(怡隆洋行)이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연락거점으로 활용됐다'는 간략한 설명이 붙어 있다. 곧 발간될 책자에 소개되겠지만 쇼는 '이륭양행'의 건물을 임시정부에 제공한 것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상하이를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에겐 회사 소유의 배를 내주기도 했다. 백범 김구도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처럼 몸을 사리지 않고 일제에 맞선 대가로 그는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지금 세계의 대세를 보라.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의 독립 역시 가까이에 존재한다. 다음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만족할 만한 일은 멀지 않았다." 한세기 전, 파란눈의 독립운동가가 했던 말이 깊은 울림을 주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일이다.
/임성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