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 지킬 때 '참' 밖으로 나타나
초조함은 건강·생명 위협하기도
세월호 등 기본 지키지 못한 결과
가식 버리고 본연 위치로 돌아가야

시인과 촌장이 부른 '풍경'(작사·작곡 하덕규)의 노랫말은 반박귀진의 전형적 본보기를 보여준다. 화자는 다음의 노랫말이 전부인 짧은 가사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읊조린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풍경'이란 단어를 들으면 산과 바다 등 자연의 경치 또는 어떤 정경이나 상황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은 스위스 알프스지대 만년설 명산이 아니다. 우리나라 설악산의 아름다운 자태도 아니다. 그것은 화자가 분명히 말하듯이 다름 아닌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이다. 세상에서 이처럼 반박귀진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한 적절한 예가 어디에 있을까 싶다.
원래 있던 제자리로 돌아가고 돌아오는 풍경은 참된 나 곧 진리의 모습이다. 제자리를 지킬 때 참이 밖으로 나타난다. 제자리에 있는 궤도를 탈선하면 늘 위기가 따른다.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다 해도 자신의 분수를 망각한 채 기고만장하면 안 된다. 그러면 허세와 거짓과 위선이 개입된다. 이 같은 과도한 욕망의 불꽃은 마음을 애태우며 불안하게 만든다. 초조함은 마음과 몸의 질병을 낳게 되어 현대인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할 때 반박귀진은 발현된다. 불평불만 등 의식적인 부정적 생각이 자아 내면에 팽배하면 자신을 바로 볼 수 없다. 또한 자신의 본래 자리를 벗어난 월권과 남용은 집단 구성원 사이에 불화와 암투를 초래한다.
말로(Malo)가 부른 '제자리로'(작사 이주엽·작곡 말로) 노랫말에도 반박귀진의 상징적 예가 녹아 있다.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이 '먼 길을' 떠나간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한낮을 떠돌고 있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기운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비었던 집'으로 각자 다시 돌아온다. 어둠이 짙게 깔리자 '도란도란' 달빛은 교교히 빛나고 있다. 별은 '물끄러미' '안식의 밤을' 지내는 이들을 은은히 비춘다. 창가에 따뜻한 '그리운 불빛이' 흘러들어온다: '길 잃은 아이 이제 제자리로/떠났던 사람 다시 제자리로/불빛 환한 밤 모두 제자리로/아픔 없는 밤 모두 제자리로'. 세상의 뼈저린 '아픔'이 없는 평온한 밤이 제자리로 돌아온 모습은 너무나 아늑하다. 심지어 아름답고 고귀하고 신성하기까지 하다.
어린아이와 어른 모두 가장 원시적인 천진(天眞) 속으로 되돌아감은 반박귀진 자체의 형상이다. 제자리로 복귀함은 원래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본연의 자신을 올바로 보는 것이다.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면 각자 서있는 위치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 결과 반박귀진의 근본인 소박과 순박의 정신을 상실하게 된다. 기본 위치로 돌아가고 돌아올 때 반박귀진의 진리 실현이 가능하다고 화자는 세상을 향해 부드럽게 그러나 강력하게 외친다. 이렇게 할 때 불투명한 혼돈의 시대를 극복하는 '어여쁜 안식'과 '고요한 평화의 밤'이 우리 곁에 따뜻하게 찾아온다: '깨우지 마라/저 어여쁜 안식의 밤을/흔들지 마라/고요한 평화의 밤을'.
수년 전 발생한 세월호 참사와 신종 감염병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공포 확산 사건도 반박귀진의 기본을 준수하지 못해 나타난 고질적 병폐의 결과이다. 또한 어느 한 대형 대학병원에서 발생한 신생아 네 명의 사망 사건도 감염관리 부실 등 기본을 지키지 못해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싶다. 진실된 나로 제자리에 돌아가고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검은 바다에 진실의 배가 가라앉는다. 지금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가식적 태도를 버리고 각자 주어진 본연의 위치로 되돌아갈 때이다. 이것이 바로 반박귀진의 요체이다.
/고재경 배화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