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이어졌다면 트럼프 설득 쉬웠을지도
실향민들 아픔 달래준 이미자 데뷔 60주년
부모님 모시고 콘서트라도 다녀와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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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로 들어서면서 전봇대가 있는 여섯 번째 집에서 일하던 식모는 온종일 이미자 노래만 불렀다. 그 노래가 어린 우리에게도 얼마나 구슬프게 들리던지 하굣길에 그 집 앞에서 담을 타고 넘어오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한참 동안 들었다. 이미자의 목소리에는 고향 생각을, 그곳에 두고 온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다. 지나가다 그녀의 노래를 듣던 다 큰 어른들도 눈물을 훔치곤 했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이 그 집 앞에 모여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일본 놈들이 많은 돈을 주고 이미자의 목소리만 샀대. 죽으면 목 해부해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하겠다는 거야. 왜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지 말이야." 이미자가 들었다면 경을 칠 일이지만, 그때는 그 말이 진짜인 줄 알았다. 그만큼 이미자의 목소리는 일본도 부러워할 정도로 최고였다.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는 숨도 제대로 쉬지도 못했어. 아버지가 소리 한번 지르면 저 구석에서 마치 죽은 쥐처럼 말 한마디 못했지. 왜 그렇게 사셨는지. 그런 어머니랑 16살에 헤어졌다. 나오면서 사진 한 장 못 갖고 나왔어. 금방 돌아갈 줄 알았거든. 이 노래가 어머니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노래는 다시 시작됐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 물론 가사도 음정도 박자도 모두 무시됐다. 그래도 노래를 듣는 우리는 단 한 번 본적 없는 할머니의 얼굴을 수없이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패티 김이나 주현미, 아니 요즘 뜬다는 홍자도 이 노래를 이미자만큼 아리게 부르지는 못할 것이다. 뜬금없이 이미자 얘기를 꺼낸 것은 며칠 전 노래 다섯 곡을 새로 배웠다는 실향민 1세대 아버지가 차 안에서 부른 '여자의 일생' 때문이다. 이 노래 말고도 다른 노래도 배웠다는데 그날 아버지는 '여자의 일생'만 부르고 또 불렀다.
다음 주면 판문점 회담 1주년이다. 지난해 4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이 발표한 '4·27 판문점 선언'에는 5번 문항에 분명 이런 문구가 명시되어 있다. '남과 북은 민족 분단으로 발생 된 인도적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남북 적십자회담을 개최하여 이산가족·친척상봉을 비롯한 제반 문제들을 협의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당면하여 오는 8·15를 계기로 이산가족·친척 상봉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 선언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지난해 8월 20일부터 22일, 24일부터 26일까지 두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이 금강산에서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의 만남은 없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철도 회담은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그 이후 서울이건 평양이건 더 이상의 '이산가족 상봉'은 없었다. '여자의 일생'을 듣던 그날 문득, "만일 우리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을 몇 번 더 추진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시키는데도 더 수월했을지 모른다. 그 역시 계속되는 이산가족 상봉을 거부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생존한 실향민 1세대도 손에 꼽을 정도다. 억세게 운이 좋은 몇 명은 이미 가족 상봉의 꿈을 이뤘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의 생사 확인조차 못 한 채, 이미자 노래를 벗 삼아 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공교롭게 올해는 이미자가 데뷔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올해도 이산가족 상봉은 틀렸으니, 부모님을 모시고 이미자 60주년 콘서트만이라도 다녀올 생각이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