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동 화재 참사가 발생하고 5일 후인 1999년 11월 4일 이른 아침, 인천 길병원 영안실에서 정명환 당시 남구청장이 주례사를 읽어 내려갔다. 목멘 주례사가 이어지는 사이 탄식과 흐느낌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두 젊은 영혼이 지금 영정으로 만나지만, 이 모순되고 부도덕한 사회에 경종을 울리며 함께 스러져간 인연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닙니다. 그날 함께 떠난 넋들을 하객으로,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남아있는 부모와 어른들을 증인으로 삼아 그대들이 영혼으로 맺어진 천생배필임을 확인하나이다."
주례의 결혼 선포로 사돈이 된 두 아버지는 서로 아들과 딸을 대신해 흑장미와 순백의 국화를 교환했다. 붉어진 눈시울을 훔치던 두 어머니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끝내 오열을 터뜨렸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자식의 넋을 조금이라도 달래보려는 부모들의 눈물겨운 배려에 두 영혼은 이렇게 백년가약을 맺었다. 열일곱, 열여섯의 꽃다운 나이였다. "신랑은 다른 아이들을 도와주다 변을 당했고, 신부는 반에서 1~2등을 다투던 모범생이었어요." 아이들을 추억하던 참석자들은 이들이 저승에서라도 서로를 보듬으며 해로하기를 기도했다.
어느덧 20년 전의 일이다. 영혼결혼식이 열린 길병원 영안실은 개인적으로 가장 슬펐던 취재현장이었다.
인현동 화재 참사 20주년을 맞는 올해, 인천에서 의미 있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인현동화재참사유족회와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인현동화재참사 20주기 추모준비위원회'가 인현동 화재 참사를 인천의 '공적 기억'으로 복원할 것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정비하고, 고통받은 유족과 지인의 사회적 치유와 희생자의 명예를 복원하여 인천시민에게 도시의 공공성을 확인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현동 화재 참사의 공적 책임과 시스템 점검이 있었다면 세월호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진단도 덧붙였다.
인현동 화재 참사는 아픈 기억이다. 상당수 유족은 마치 손에 박힌 가시와도 같은 '아픈 기억'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그 아픈 기억이 지금까지도 통증을 일으키는 것은, 무수히 많은 '신약 개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가 상처를 치유하고 예방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임성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