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령 법정에서 승리한다 한들
국민은 '별개의 정치심판' 할 것
인간과 동물의 변별성은 품위
'수신'이야말로 유력한 방편

삼강오륜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내 나이 이립(而立) 즈음, 최봉영의 '주체와 욕망'을 읽으면서였다. 나를 존재케 한 분들이 부모이니, 부모의 은혜를 잊어서는 아니 된다. 선비에게 직업 세계로의 진입이란 출사인바, 왕을 정점으로 하는 그 세계에서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남자와 여자는 같지 아니하므로, 그 차이를 알아 서로 존중해야 한다. 예컨대 부위자강(父爲子綱),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란 그러한 관계들의 교차 가운데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 나가라는 지침이었던 것이다.
근대 체제의 작동 방식과 비교했을 때 이는 실로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우선 자유로운 개인을 전제로 한다. 홀로 떨어져 존재한다면 완전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을 터이나, 실상 그는 사회 내에서 다른 개인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사회계약에 따라 자유가 제한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떤 개인에게 허용된 무한한 자유는 필연코 다른 누군가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개인은 계약 사항, 다시 말해 법의 울타리만 넘어서지 않는다면 그 안에서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
반면 우리네 선인들은 자유로운 개인에 앞서서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를 강조하였다. 도리가 부각되었던 까닭은 이 세계를 관계들의 총합인 통체(統體)로 전제하였기 때문이다.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이 없을진대, 어찌 그 관계를 전제치 않는 자유로운 개인을 상정할 수 있단 말인가. 개인의 자리를 규정하는 관계가 그 하나로 한정될 리 만무하다. 이로써 개인은 통체의 부분자(部分子)로 자리매김하게 되며, 부분자는 선재하는 도리의 체득을 위하여 힘써야 했다. 수신 주체인 개인이 근대의 주체인 개인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요즘 국회에서 생산하는 뉴스를 접하노라면, 최소한의 수신마저 증발해 버린 정치권의 민낯을 확인하게 된다. 민주주의가 민의의 반영으로부터 성립함은 상식에 속한다. 국회의원 선출 방식이 승자독식 구조에 갇혀 있으니, 다양한 민의를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려는 변화는 당연히 모색되어야 한다. 각 정당의 손익계산이야 피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이러한 대전제는 마땅히 수용해야 하는 것 아닐까. 자유한국당은 그동안 이와 관련된 논의에 딴죽 걸면서 밖으로만 빙빙 내 돌았다. 지금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는 데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은 패스트트랙 적용이 위법하다고 사생결단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적법성 여부야 따져볼 수 있겠으나, 볼썽사나운 동물국회의 귀환은 동의하기 어렵다. 제 눈의 들보는 못 본다고, 폭력성을 앞세운 동물국회가 준법에 근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임이자 자유한국당 의원의 문희상 국회의장에 대한 성추행 고소는 동물국회를 막장으로 이끌고 있다. 영상을 보면, 그녀는 끌어안듯이 두 팔을 활짝 펼치고서 "나 건들면 성추행"이라며 국회의장을 몰아붙이던 상황이다. 우르르 몰려들어 국회의장을 겁박하던 자유한국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여성의원들이 나서라" 소리가 흐르기도 했다. 국회의장이 페이스에 말려들고 말았으니, 일견 그네들이 이긴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지켜보는 국민들은 임 의원이 목소리 높여 피력하는 "감당할 수 없는 수치심과 모멸감"의 진정성을 어찌 생각할까. 판단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이 한다. 설령 법정에서 임 의원이 승리한다고 한들 국민들은 그와 별개로 정치적 심판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선인들은 왜 하필이면 스스로를 수신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려고 했을까. 한낱 동물에 불과한 인간이 여타 동물과 변별되는 품위를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수신이야말로 인간의 품위를 확보하는 가장 유력한 방편일 수 있다. 동물국회를 보면서 내린 나의 결론이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