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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막을 수 없는 법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말이다. 아키히토 (明仁) 시대가 어제 끝났다. 1989년 시작한 '헤이세이(平成)'가 막을 내렸다. 31년의 영욕(榮辱). 아키히토의 헤이세이도 이전 히로히토(裕仁) 쇼와(昭和) 만큼 격동의 시대였다. 장기 경제불황을 겪어야 했고 나고야 대지진과 후쿠오카 원전사고 등 큰 재난이 덮쳤다. 그때마다 아키히토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일본 국민에게 다가갔다. 그의 시대가 끝났다. 오늘부터 일본은 나루히토(德仁)의 레이와(令和) 시대다.

그동안 일본의 연호는 중국 고전에서 빌렸다. 하지만 레이와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모음집 '만엽집(萬葉集)'의 '매화(梅花)의 노래 32수(首)' 중에서 '初春令月 氣淑風和(초춘영월 기숙풍화·날씨가 맑고 바람이 부드럽게 부는 새 봄)'에서 골랐다. 레이와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마음을 서로 모아서 문화를 태어나게 하고 키우자'는 뜻도 있다. 외국 언론도 일본의 새 시대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영국 BBC방송은 '레이와'를 '질서와 조화',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상서로운 평화'를 의미한다고 보도했다. 폭스뉴스는 '평화를 추구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일본인들도 레이와 시대에 거는 기대가 큰 모양이다. 요미우리신문의 여론조사 결과 일본 국민의 58%가 '일본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나루히토 일왕의 즉위에 맞춰 5월 2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한다. 때를 맞춰 미 해군의 최신형 강습상륙함인 아메리카호와 스텔스 상륙함인 뉴올리언스호가 올 하반기 미 7함대 소속으로 주일미군 기지에 전진 배치된다. 미국과 군사적 밀월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아베 정권 입장에선 '새 시대'라는 분위기를 빌미로 일본을 더욱 강력한 군사대국으로 만들려 하는 의도다.

문제는 '멀고도 가까운 이웃'인 우리다. 한·일 관계는 역대 최악이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레이와 시대를 맞아 우리가 먼저 손 한번 내미는 것은 어떨까. 정치는 타이밍이다. 외교관계도 마찬가지다. 새 일왕의 즉위는 경색된 관계를 개선하고 재정립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일본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파국으로 치닫는 건 양국 모두에게 절대 바람직하지 않아서다. 사이 나쁜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미는 것, 그건 굴욕이 아니라 '삶의 지혜'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