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세계정책연구소 대표 미셀 부커는 자신의 저서 '회색 코뿔소가 온다'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다보스에 모인 사람들은 그가 강조하는 '회색 코뿔소(Grey rhino)'에 주목했다. 코뿔소는 시력이 약해 멀리 볼 수가 없는 대신 후각이 발달해 이에 의존해 풀을 뜯어 먹고 산다. 초식동물답게 성격은 온순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면 그쪽을 향해 앞 뒤를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세렝게티에서 코뿔소가 눈에 띄면 일단은 경계해야 한다. 부커는 지속적인 위기 경고음이 울리는데도 이를 간과하다가 더 큰 위험에 빠지는 것을 '회색 코뿔소'라고 칭했다.
'회색 코뿔소'와는 달리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블랙스완(Black swan)'이라고 한다. 18세기 호주에서 발견된 '검은 백조'는 '백조는 하얀색'이라는 통념을 깨뜨렸다. 2007년 미국 서브 프라임 사태로 세계 금융 위기가 닥치자 레바논 출신의 월가 증권분석가 나심 탈레브는 저서 '블랙 스완'을 통해 위기를 경고하며 통계적 예측의 한계를 넘은 극단적 상황이 가져올 파국을 분석했다.
'블랙 스완'이나 '회색 코뿔소'같은 말이 끊이질 않고 회자하는 것은 경제라는 것이 논리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블랙 스완'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터지는 데 반해, '회색 코뿔소'는 지표를 통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위기를 알리는 각종 경제 지표를 무시하다가는 갑자기 우리에게 달려든 코뿔소에 희생되고 만다.
문재인 정부 2년을 맞아 우리 경제에 대해 '회색 코뿔소'를 경계해야 한다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올 1분기 성장률은 -0.3%로 2008년 4분기 이후 최저를 기록하고 여기에 최근의 환율 급등과 미·중 무역전쟁 격화, 중국 부동산 거품 붕괴 위기 등 대내외적으로 잇단 경고음을 내며 '회색 코뿔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과 친노조라는 경제정책을 바꾸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은 오히려 "경제성장률이 2분기부터는 점차 회복돼 개선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렇게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나라 안팎에서 어슬렁거리는 회색 코뿔소들이 갑자기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