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갈릴레이의 생애' 공연은
'이미 아닌… 아직 아닌 힘들' 갈등
'체제의 법' 보존·신설놓고 파워게임
극작가들이 자주 다루는 이유는
현시대 메시지 전할 수 있기 때문


전문가 권순대2
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지난 4월 5일부터 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 공연이 있었다. '갈릴레이의 생애'는 "낡은 시대의 끝에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다"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아닌 힘들과 아직 아닌 힘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연극이다.

이미 아닌 힘들은 비록 낡은 시대의 불합리성을 드러내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 체제의 법을 보존하려는 막강한 힘을 행사하게 된다. 반면 아직 아닌 힘들은 비록 시대의 합리성을 간직하고 있을지라도 미처 새로운 체제의 법을 제정하려는 강력한 힘을 행사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극작가들이 두 힘들 사이의 갈등을 자주 다루는 까닭은 이러한 갈등이 그 자체로 풍요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시대에 대해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도 예외가 아니다.

브레히트는 서사극을 창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관객이 연극을 통해 사회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획득함으로써 사회가 변화하길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서사극의 여러 장치를 활용했다. 제4의 벽(연극의 사실적 재현을 위한 가상의 벽으로, 관객은 이를 통해 무대를 마치 현실의 한 장면처럼 받아들게 된다)을 허물기 위해 무대장치와 노래를 활용하거나 배우와 등장인물을 분리하는 연기양식을 도입했다. 이제 무대는 무대일 뿐이며, 현실을 통찰하기 위한 교실이 된다.

브레히트가 갈릴레이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신발보다 나라를 더 많이 갈아 신었다고 할 정도로 일생 동안 망명 생활을 해야 했던 그는 '갈릴레이의 생애'를 통해 1930년대의 독일과 유럽 사회를 비판하고자 했다. 문명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야만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했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갈릴레이의 생애' 덴마크판본(1938~39) 이후에도 미국판본(1945)과 베를릴판본(1954~56)을 생산할 정도로 개작 작업을 반복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익숙해진 세계에서 우리는 사회의 제도나 문화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자명성은 한 사회의 제도나 문화가 갖고 있는 그늘을 가리기 쉽다. 이는 갈릴레이가 어린 안드레아에게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할 때, "눈을 뜨고 있는 건 보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 대사와 닿아 있다. 익숙한 자명성의 눈으로는 비록 눈을 뜨고 보더라도 그 현상의 진실을 모두 보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명동예술극장의 이번 공연이 브레히트의 갈릴레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에 브레히트의 갈릴레이를 다시 호명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시대의 반지성주의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무대 위의 갈릴레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이성의 시대를 열기 위한 지난한 과정에서 지성이란 한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공적 형태에 의해 발현한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반지성주의자들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라며 반지성의 무시간성을 비판한 우치다 다쓰루에 따르면, 사회성과 공공성은 찬동자의 많고 적음에 의해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향해 시간적으로 열려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된다. 지성은 개인의 산물이 아니고 집단적인 현상이기에 그러하다. 갈릴레이가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원경으로 관찰하게 하면서까지 신학자들에게 증명하려 해도 그들이 귀 기울이지 않을 때, "근거를 제시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시체들뿐"이라는 대사로 받아칠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브레히트는 관객이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모자와 함께 그들의 두뇌를 벗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극장이 교실로 바뀌길 원했다. 그러나 관객이 더 이상 극장을 찾지 않는 시대라면 대체 연극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쩌면 모자와 함께 두뇌를 벗어버리는 태도를 바꿔야 하는 곳은 극장이 아니라 사회일지 모른다.

/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