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부인, 즉 퍼스트레이디의 진면목을 보여준 건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여사였다. 퍼스트레이디 자격으로 처음 기자회견을 했고, 정부예산으로 부속실 직원을 둔 것도 그였다. 1948년 UN 총회의 미국 대표로 세계인권선언을 만장일치로 이끌어냈다. 검소했지만 우아했고, 무엇보다 지적이면서도 겸손했다. "자신을 다룰 때는 머리를 쓰고 남을 다룰 때는 가슴을 쓰라"는 숱한 명언도 남겼다.
최고 권력자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퍼스트레이디의 막강한 영향력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대부분 퍼스트레이디는 이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데서 부담감으로 상당한 공포와 불안감을 경험하곤 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부인 패트 닉슨은 "퍼스트레이디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무보수 직"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 다니엘 여사는 이런 중압감 때문에 엘리제 궁의 입주를 거부하고 14년 동안 사가에 거주했다.
우리나라에서 퍼스트레이디는 영부인(令夫人)이다. 원래는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이었는데 대통령 부인의 호칭으로 굳어졌다. 우리 국민들에게 고 육영수 여사의 이미지 때문인지 영부인은 '조용한 내조와 온화한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영부인의 스타일에 따라 그 영향력은 천차만별이다. 행동이 많으면 너무 나선다고 눈총을 받고, 내조에 충실하면 존재감이 없다는 소리를 듣지만 내놓고 활동을 하든, 내조만 하든 영부인은 대통령에게 늘 귓속말을 할 수 있는 '제1의 특별조언자'임에는 틀림없다.
'영부인'이 '여사'로 바뀐 것은 이희호 여사가 청와대 안주인이 되면서부터였다. 이 여사는 "국가 지도자의 부인도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 누구보다도 영향력이 강한 퍼스트레이디였다. 이 여사는 대통령 부인이기 이전에 47년간 옥바라지와 망명, 가택연금 등 정치적 고초를 함께 겪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생 동지이자 정치적 조언자였다. "그를 쳐다보면 왠지 아렸어요. '차라리 김대중이란 사람이 없었다면…' 그가 무너질 때마다 따르던 사람들이 가슴을 쳤지요.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기적처럼 일어났어요"라고 했던 이희호 여사가 10일 밤 별세했다. 향년 97세. 언제나 "아내가 없었다면 나도 없었다"고 말했던 영원한 동지 DJ 곁으로 떠났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