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는 시민의 정치참여를 '민주주의 정신'이라고 확신했던 대통령이다. 2011년 9월 국민청원 웹사이트 '위 더 피플(We the People)'을 개설한 것도 그래서다. 30일간 1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백악관 공식 답변 대상이 됐다. 무분별한 청원을 막기 위해 모두 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선출직 공직 후보자를 지지, 반대하거나 삼권분립에 어긋나는 청원은 아예 받아주지 않았다. 2016년 12월 기준으로 1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은 4천799건의 청원 중 277건에 대해 답을 주었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휴대 전화 사용자들이 자신들의 전화기를 다른 통신사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 '동성애자 전환 치료를 금지하라'. 이들 청원에 대해 백악관은 관련 기관에 개정을 요구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는 말로 유명한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 선수 요기 베라에게 '대통령 자유 메달'이 수여될 수 있었던 것도 국민 청원 덕분이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후, 청원 게시판은 지지부진한 답변으로 열기가 시들해졌다.
'위 더 피플'을 벤치마킹한 청와대 게시판은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2017년 8월 17일 문을 열었다. 미국과 달리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청와대의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초기엔 국민이 직접 정책을 제안하고 의견을 내는 직접 민주주의의 본보기라는 긍정적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요즈음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부정확한 사실을 확산시키고 여론 재판을 부추길 수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지나친 정치적 편향도 논란의 대상이다. 청원 게시판이 정당해산, 대통령 탄핵 등 정치적 선동과 지지세력 간 정치적 대결의 장으로 퇴색된 지는 이미 오래됐다.
청원 게시판이 또 시끄럽다. 정당 해산 청구 청원에 대해 청와대 정무수석이 직접 나서 "정당에 대한 평가는 국민의 몫"이란 답변 때문이다. 한국당은 "청와대가 선거운동에 나선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 모두 예견된 것이다. 분명한 건 이제 미국처럼 청원 대상에 명확한 한계를 둬야 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그게 어렵다면 이번 기회에 청원 게시판을 폐지하고 국민청원 기능을 국회로 넘기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다가 '민주주의 정신' 청원 게시판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국론을 분열시키는, 처치 곤란한 '괴물'로 변하지 않을지 정말 걱정이다.
/이영재 논설실장